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스토커였다. 엄청나게 끈질긴 꼬마 스토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여섯 살부터 3년을,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무섭게 좋다고 따라다니던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니. 그게 말이 돼? 남에겐 잊지 못할 치욕을 선사해 놓고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니. 해리성 기억 상실도 아니고,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태형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이게 단순히 태형에게 거는 햇살의 장난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그걸 간파해 내는 게 관건이었다. 눈빛이 맹하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순수하다고 말했겠지만, 태형의 눈에 비친 햇살의 눈은 그저 맹할 뿐이었다. 
어쩌면 정말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왜 기억을 못해!

-본문 중에서-

“숨이…….”
그의 품에서 햇살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놀라 부릅뜬 눈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까르르거리는 아이들과 잡히지 않으려 폴짝거리는 메뚜기를 질겁해 쳐다보던 태형의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가 그녀의 몸을 꽉 조인 탓이었다. 
“아파요, 태형 씨.”
귓가에 스며든 햇살의 가녀린 목소리에 그제야 태형이 햇살을 돌아봤다. 급히 고개를 돌리느라 제대로 그녀의 위치를 가늠하지 못했다. 아니, 자신이 그녀를 안고 있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아, 이런.’
그를 올려다보느라 들린 햇살의 입술과 무의식중에 고개를 내려 햇살을 보려던 태형의 입술이 묘하게 맞물렸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태형의 입에서 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햇살이 그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시간이 멈춘 듯 태형의 움직임도 멈췄다. 그렇게 몇 시간 같은 수 초가 흐른 후 겨우 정신을 차린 태형이 얼른 햇살을 놓고 물러섰다. 
메뚜기에 놀라 여자를 끌어안은 것도 모자라 입술까지 맞추다니, 이게 무슨 망신이람. 
얼굴을 붉힌 햇살이 뭐라 말도 못하고 그를 바라보고 서서 눈만 깜빡거렸다. 태형이 잘근 아랫입술을 깨물다 흠흠 헛기침을 했다. 실수였다곤 해도 어쨌거나 그녀를 안은 것도 입을 맞춘 것도 태형이었다. 
“미안합니다.”
그의 사과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태형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햇살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정작 그의 귀에 들린 건 괜찮다는 햇살의 말이 아니었다.
“얼레리 꼴레리! 뽀뽀했데요.”
“껴안았데요.”
“키스했데요.”
쪼잘거리는 앵무새처럼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건 분명 아이들의 목소리였다. 태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봤다. 둘을 에워싼 꼬맹이들이 신 나서 방방 뛰어 대고 있었다. 아이들의 손엔 팔딱거리며 살려고 발버둥 치는 메뚜기가 쥐어져 있었다. 단박에 그의 인상이 구겨졌다. 니들은 그게 끔찍하지도 않냐? 슬며시 메뚜기와 거리를 유지하며 그가 짙은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메뚜기가 무서워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말을 할 수도 없고, 상황이 참 난처하게 됐다. 
“그런 게 아니야, 이건 그냥.”

목차

프롤로그
제1장. 첫사랑도 소꿉친구도 아닌
제2장.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리면 곤란해
제3장. 지독히 이기적인 기억
제4장. 아이가 생기는 방법
제5장. 몰랐어, 나도 내가 이런 놈인 줄 
제6장. 나랑, 썸 타 볼래요?
제7장. 내 방에서 잘래? 
제8장. 내 사랑이 먼저야
제9장. 내일 더 사랑해
에필로그 옛날 옛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