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신국 한성의 한 집 앞에 버려진 아기.

업둥이가 되었어야 할 아이는 그 집 주인의 첩에게 발견되어 얼자로 자라게 된다.

형보다 뛰어나지만 반쪽 양반인 그에게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고, 거기다 결코 바랄 수 없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는데……. 

박운해(한도윤) 

뒤바뀐 운명을 알지 못하고 있다. 제 앞에 가로막힌 신분의 벽이 버겁기만 하다. 하지만 오르고 또 오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바로 공주 소령 때문에. 

이소령 

사랑 앞에 저돌적인 철모르는 공주님. 얼자인 운해를 사랑하면서 조금씩 성장한다. 

박영해 

아버지의 사랑을 가져간 것도 모자라 자신보다 뛰어나기까지 한 운해를 미워한다. 공주 소령을 사랑하여 그녀의 배필이 되기를 원한다. 

박세영 

어린 시절 엄청난 비밀을 알아 버린 후, 운해를 더 이상 오라비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운해를 흔드는 공주 소령이 원망스럽다. 

-본문 중에서-

“더 험한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당장 사라져!”

그들은 땅에 부딪힌 충격으로 얼이 빠져 있다가 슬금슬금 뒷걸음치며 차밭을 나가 버렸다. 그들이 나간 것을 확인하고야 운해는 소령에게 다가갔다. 소령은 아직도 땅에 주저앉은 채였다. 운해는 그녀가 혹시 겁에 질려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괜찮아? 어디 다친 곳 없어?”

소령은 꼼짝하지 않고 운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혼자 둬서 미안.”

운해는 호위한답시고 따라와 할 일을 제대로 못 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꼈다. 소령을 시야 밖으로 벗어나게 둔 것은 큰 실수였다.

“일어날 수 있겠어?”

그는 소령의 손을 잡아 일으키려 했다.

“엇!”

다음 순간 그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소령이 다시 주저앉으며 손을 홱 잡아당긴 탓이었다. 넘어진 그는 땅에 손을 짚어 소령을 덮칠 뻔한 걸 겨우 면했다.

“무슨 짓이야?”

갑작스러운 소령의 행동에 운해는 어이없고 화가 났다. 그러나 소령은 답이 없었다. 문득 운해는 소령의 얼굴이 너무 가깝다는 걸 의식해 버렸다. 그녀의 작은 얼굴과 입술이 지나치게 가까이 있었다.

사찰 내에 밝혀진 대낮 같은 빛은 담을 넘어오지 못했고, 차나무가 병풍처럼 그들 주위에 둘려 있었다. 그들 옆에 놓인 등빛은 너무 연약해서 허공에 가득한 은밀한 어둠을 몰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운해는 어둠이 무거웠다. 그것은 그의 위와 옆에 가득해서 그를 마구 짓눌러 댔다. 바로 아래, 소령의 얼굴이 있었다. 이 때문에 제 머리가 그 중압감을 이겨 내지 못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을 보듯 뻔했다.

이것이야말로 미친 짓이 아닌가. 운해는 지금 이 순간 제 가슴과 머리를 지배하는 강력한 욕망에 무릎 꿇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했다. 거대한 바위같이 저를 찍어 누르는 힘에 결코 져서는 안 되었다.

그는 정말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나중에라도 오늘의 저를 크게 칭찬을 해 주고 싶을 정도로 방금 그의 마음속 사투는 치열했다.

그러나 곧 그는 예상치 못한 일에 휘말리고 말았다. 소령의 양손이 위로 뻗어 오더니 그의 목을 잡아 강하게 끌어당겼다.

소령은 그를 아주 넘어지게 하지 못한 대신 제 입술을 힘을 다해 그에게 밀어붙였다. 순식간에 입술을 빼앗긴 운해는 심장이 뚝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가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어찌할 바를 모른 그녀는 입술을 비비대고 있을 뿐이었는데도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에도 소령이 제게 입맞춤을 한 적이 있었다. 그저 닿았다 떨어졌고 남녀 사이의 일을 전혀 몰랐던 때였는데도 설레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한동안 애를 먹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비슷하면서도 사뭇 달랐다.

그녀의 말캉하고 보드라운 입술은 더 이상 어린 시절처럼 풋풋하지 않았다. 애써 외면했지만 그녀가 이미 여인임을 뼈저리게 느껴 버렸다. 아니, 훨씬 이전부터 소령은 제게 여인이었다. 그러니 이런 접촉은 제게 지극히 위험했다.

운해는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로 밀려나지 않겠다는 듯 죽을 둥 살 둥 몸을 밀착시켰다. 운해는 제 안에서 곧 무언가 끊어질 듯해 미칠 것 같았다. 마침내 그의 이성이 간두지세(竿頭之勢 대막대기 끝에 선 형세)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운해야.”

여전히 그의 입술에서 제 것을 떼지 않은 소령이 신음 같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툭. 무언가 그의 안에서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흐읍!”

상황이 역전되고 말았다. 운해가 우리에서 풀려난 맹수처럼 갑자기 소령에게로 달려들었다. 사정없이 밀린 소령의 뒤통수가 운해의 커다란 손에 받쳐진 채 땅에 떨어졌다. 돌변한 운해에게 놀란 그녀가 저도 모르게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자, 이제 와서 거절은 있을 수 없다는 듯 운해가 그녀의 한쪽 손목을 붙들었다.

그가 강한 혀 놀림으로 그녀의 꽉 다물린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소령은 먼저 덤벼 놓고는 제가 더 놀라 정신이 나갈 지경이 되었다. 비집고 들어오려고 건몸을 단 운해의 혀 놀림에 못 견딘 소령이 입술을 살짝 벌리자 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거세게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이와 잇몸을 격렬하게 쓸었다.

살짝 겁을 먹은 그녀가 이를 악물고 있어도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숨이 막힌 소령이 신음과 함께 살짝 이를 떼자, 그의 혀가 그 사이를 사정없이 벌리며 비집고 들어왔다. 놀란 소령이 이를 다무는 바람에 그의 혀가 살짝 깨물렸지만, 그는 움쩍도 하지 않고 그 작은 공간에서 그녀의 혀를 찾아내어 말아 올렸다. 소령의 혀가 그를 피해 달아났으나 그가 쫓아와 옭아맸다. 다시 달아나자 그가 또 쫓아와 얽혔다.

소령의 작은 몸짓에 운해는 미칠 것 같았다. 자꾸 달아나는 그녀의 귀여운 앙탈에 돌 것만 같았다. 그는 끓어 넘치는 감정을 어찌하지 못해, 얼떨떨해 있는 소령을 땅에 박을 듯 밀어붙이며 그녀의 입술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소령은 어깨 양옆으로 손을 늘어뜨린 채 그의 거친 입맞춤을 받아 내고 있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소령의 입술을 실컷 맛본 뒤에야 서서히 정신을 차린 운해는 제가 경악할 만한 짓을 저질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네가 미쳤구나! 마침내 미치고야 말았구나!

운해는 자제력을 상실하고 한 짓에 충격을 받았다. 고귀한 공주님의 입술을 유린하다니, 제가 정녕 돌지 않고서야 벌일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을힘을 다해서 숨겼던 마음을 어이없이 드러내고 말았다. 긴 세월 단단히 세웠던 벽이 소령의 가벼운 도발에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버리다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쉽게 입술을 떼지 못했다. 꿀처럼 달콤한 소령의 입술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거칠게 몰아치던 것을 부드럽게 핥는 것으로 대신한 게 다였다.

소령은 무섭게 달려드는 그에게 두려움을 느꼈는지 작은 반항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운해의 육중한 몸에 깔려 가녀린 몸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제정신이 돌아온 운해는 그제야 그것을 느끼고 입술을 힘겹게 떼어 냈다.

헉헉…….

그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부족한 숨을 보충하느라 거칠게 헐떡거렸다. 소령은 가슴을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쉬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맹수처럼 위험하게 번뜩였다.

“이제 알겠어? 사내를 함부로 자극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가 쉰 목소리로 내뱉었다. 운해에게서 평소에 들어 본 적이 없는 묘하게 갈라지는 소리에, 소령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운해는 냉랭하게 말해 놓고 후회했다. 취객들을 만나 놀라지는 않았는지, 다친 곳은 없는지 그런 걸 물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다정한 질문을 하기엔 이미 엄청난 일을 저지른 뒤였다. 이 치명적인 실수를 어떻게 수습해야 한단 말인가.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러나 그는 곧 고민을 멈춰야 했다. 숨을 고른다고 보기엔 그녀의 가슴 부근이 비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호흡도 이상했다. 마치 울음을 억누르지 못해 훌쩍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혹시 우는 건가?

그는 어두워 보이지 않는 그녀의 표정을 가늠하기 위해 손을 그녀의 입술에 대 보았다. 입맞춤의 흔적으로 촉촉하다 여긴 것도 잠시, 경련하는 입술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었다.

나 때문에?

운해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제가 소령에게 짐승 같은 짓을 해서 그녀가 놀란 것이 틀림없었다. 운해는 제가 소령을 울렸다는 걸 알고 괴로움에 휩싸였다. 제 마음 하나 간수 못 해서 어리고 순진한 소령을 놀라게 하다니 저는 진정으로, 진정으로 미친놈이었다.

소령의 입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자 운해는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내버려 두자니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고, 그렇다고 안고 달래자니 제가 한 짓에 놀란 소령을 더 놀라게 하는 짓이 될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킨 운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손만 쥐었다 폈다 하는데, 상체를 일으킨 소령이 갑자기 운해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운해는 너무나 놀라서 돌처럼 굳었다. 그런 짓을 한 저에게 오히려 안아 달라는 듯 파고들다니. 그는 이게 무슨 일인가 하였지만 이내 손을 들어 그녀의 여린 등을 쓸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떨고 있었다. 그 원인이 그 취객들 때문인지, 저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그녀는 지금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해 보였다.

계속해서 그녀의 등을 쓸어 주면서 그는 오히려 자신이 위로받는 기분에 휩싸였다. 너무나 격렬하게 들끓은 나머지 도리어 결핍을 느끼던 마음이, 소령을 안고 있는 지금에야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소령이 가장 연약한 이때가 아니면 다시는 사과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미안.”

“그런 걸로 사과하지 마!”

소령은 주먹으로 운해의 가슴을 팡 쳤다.

미안하다고 하면 네가 실수한 게 되잖아. 마음도 없으면서 내가 매달려서 그랬다고 하는 것 같잖아.

소령은 속으로 원망의 말을 쏟아 내었다.

“가만 안 둘 거야!”

운해는 눈을 꼭 감았다.

그래, 네 분이 풀릴 때까지 날 때리든지 날 어디에든지 발고해. 공주를 욕보인 죽일 놈이니 당장에 의금부에 넘겨 버려. 너를 향한 이 마음은 죽어야 멈출 것 같으니까!

언가 결정해야 할 때 많이 생각하지만 결국은 행동하지 않는,
옳은 일에 대한 사색은 있으나 앞으로 나서지 않는,
끊임없이 입바른 소리를 해 대지만 스스로에겐 너무 관대한,
그런 표리부동한 뇨자.


[출간작]

돌아온 첫사랑
연화 아씨전 1~2
첫눈 속을 걷다 1~2(작가 9인 단편집 中 ‘천년을 흐르다’)
태왕의 신부
매혹의 밸런타인(단편)
성(性)스러운 혼인
상사몽
빈하수 드리우고 1~2
공주 부부 위아래전 1~3


[출간 예정작]

벼랑 끝에 걸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