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나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혼자 누르고 참으며 살아내는 것이 너무나도 익숙한 서민하. 5년간 짝사랑해온 선배로부터 고백받은 날 저녁, 뜻밖에도 다른 세계로 떨어져버린다! 왕이 되려는 르 프란델의 대관식 날 그를 깔아뭉개며 떨어져 내린 탓에 순식간에 예언의 주인공 은의 레이디가 되어버린 민하.

그녀가 택하는 자가 태평성대를 가져올 왕이 된다는 빗나갈 수 없는 예언의 존재 때문에 그녀를 못마땅해 하는 차가운 미남자 프란델을 비롯해, 프란델과 대비되는 화려한 미모와 유혹적인 태도를 보이는 왕족 엘 카이레스에게 청혼을 받는데…….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민하는 프란델과 가짜 약혼을 하게 되고, 점차 은의 레이디로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오니,”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으로 조용히 민하를 올려다본다.

민하도 그의 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변은 온통 밝고 어두웠으며 파도치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아주 잘 들리는 목소리로 그가 말을 꺼냈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2. 작가 소개

남수아

커피 줄이기를 평생의 과업으로 삼고 하루하루 정진하고 있습니다.

블로그 blog.naver.com/storyholic

3.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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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리 보기

짧은 흑발에 푸른 눈, 이목구비가 선명하고 콧날이 반듯한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민하는 잠깐 숨 쉬는 걸 잊었다.

화보에서 튀어나온 듯 모델 같은 느낌의 미남이었다. 어디 있어도 시선을 확 붙들 것 같이 날카로운 압도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눈. 아몬드형 눈매 안에 빛나는 푸른 눈동자는 어떻게 저런 색이 있을 수 있지 싶을 정도로 새파란 빛깔이었다.

그런 눈동자로 처음 보는 남자가 민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뭐……, 뭐지?’

남자의 시선이 너무 강렬해서 민하는 눈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손에 당겨져 균형을 찾았다.

“아, 저 미안…….”

뒤늦게 꺼내려던 사과를 막듯이 그가 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이 매끈하고 긴, 그러나 얼굴을 다 덮을 듯 커다란 손이 마치 민하의 목을 죌 것처럼 구부러졌다.

“어……,”

착각이었다. 그는 대체 뭘 하려던 것인지 손을 거두고는 홱 돌아서며 말했다.

“손님을 내실로 모시도록.”

돌아선 그의 등 뒤에 벨벳 망토가 펄럭였다. 저 사람이 왕이었다.

왕은 그대로 걸으며 주교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대관식을 계속하지.”

끊어졌던 음악이 다시 연주되기 시작했다.

시녀로 보이는 아가씨들이 다가와 민하의 팔을 잡았다. 민하는 그 아가씨들을 보면서 이 손을 뿌리치고 도망쳐야 할까, 아니면 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좋을까를 가늠했다.

그때 뒤쪽에서 선명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의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뒤쪽으로 쏠렸다.

반사적으로 뒤돌아본 민하도 놀랐다.

사람들이 길을 비키듯 갈라서고 그 사이로 방금 소리친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성이었다. 눈썹 위를 흐르는 결 좋은 금발이 빛 오라기처럼 빛났고 새하얀 피부가 자아내는 섬세한 얼굴 생김은 비율이 정확해 예술품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야말로 눈이 환해지는 미남이로구나 하는 기분으로 멍하니 그를 보던 민하는 멈칫했다.

그가 똑바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한테 오나? 아니겠지?’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벽처럼 모여 있어서 갈 데가 없었다. 그렇게 몰리는 기분으로 민하는 점점 가까워지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비율이 좋아서 멀리 있을 때는 작아 보였던 모양이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민하는 그를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그 또한 민하를 보고 있었다. 분명 가슴이 떨리도록 예쁜 사람인데, 크고 깊은 눈매의 보라색 눈동자와 입가에 고인 자신만만한 웃음이 그를 위험해 보이게 했다.

“안녕하세요?”

그가 민하에게 말을 걸었다. 민하가 대답하려는 찰나, 그가 사람들을 향해 찌르듯 외쳤다.

“은의 레이디가 나타났는데, 대관식을 계속 진행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사람들의 수런거림이 커졌다.

그가 민하의 손을 잡았다. 뿌리치지 못했던 것은 손을 잡자마자 그가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정중한 자세로 그가 민하의 손등을 자신의 이마에 대었다. 그렇게 그가 민하를 향해 말했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레이디?”

한순간 주변이 침묵에 휩싸였다.

“무, 무슨. 결혼이라니…….”

민하의 말은 뒤이어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외침에 묻혔다.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평생 여왕처럼 모시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튀어나와 민하의 발밑에 무릎 꿇었다. 한 번만 봐달라는 듯 손을 뻗으며 각자의 공약을 외치기 시작했다.

“저와 결혼해주시면 교외의 성 두 채와 바즈바란 신문사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전 재산을 바치겠습니다! 제 재산 목록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민하는 너무나 황당한 나머지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짝! 쳤다. 꿈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한 일이었는데 더럽게 아팠다.

‘꿈이 아니면 대체 뭐냐고!’

자신과의 결혼을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은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민하의 발밑에 무릎 꿇고 시선 한번 받으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것을 내놓겠다는 사람들의 외침 때문에 숫제 경매장 같은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전 재산을 내놓고서라도 민하를 원했다.

심지어 참가자 중에는 여자도 있었다.

“제 동생이 되어주시겠어요? 세상 모든 반짝이는 걸 다 가져다 드릴게요. 동생님.”

‘언니가 제일 반짝거려요!’

간절한 어투로 말하는 ‘언니’가 청순한 느낌으로 너무 예뻐서 민하는 한순간 이성을 빼앗길 뻔했다.

그 혼란을 후려치듯 뒤편에서 호통이 울렸다.

“지금 이게 무슨 소란이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시오!”

왕이었다. 사람들은 그 큰 목소리에 놀란 듯 그쪽을 한번 돌아보았으나 태도를 바꾸진 않았다.

민하는 자신이 태풍의 눈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어깨를 움츠렸다. 열망에 찬 눈동자들은 정말로 민하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뭔가……, 이것저것 물어볼 사람이 필요한데!’

저 청혼자들에게 손을 뻗었다가는 그대로 번쩍 들려 결혼식장으로 납치될 것만 같았다.

민하는 머리를 굴려 아까 봤던 예쁜 ‘언니’를 돌아보았다.

‘적어도 이쪽은 결혼이 아니니까…….’

시선을 받았음을 눈치챈 예쁜 언니가 화사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여자라도 반할 만한 눈웃음이었다.

“저기…….”

그때였다.

지지직……. 지직…….

노이즈가 들렸다.

마치 고장난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부서진 소리처럼, 소리이되 소리 같지 않은 소리조각들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실례.”

순간 누군가가 민하의 손을 잡았다. 놀라 돌아보니 첫 번째 청혼자가 바싹 옆에 와 있었다.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술 위에 가져다 대며 그가 말했다.

“잠시만 참아요. 좋은 구경거리가 생길 것 같으니.”

“무슨…….”

그리고, 노이즈가 선명히 커졌다.

지지지지직!

그와 함께 주변의 모든 것이 위로 떠올랐다.

“으앗!”

“꺄앗!”

“으아아!”

놀란 비명이 쏟아졌다. 사람과 물건이 전부 위로 치솟았다.

그것은 세상이 뒤집히지 않은 채로 뒤집힌 듯한 광경이었다. 사람들이, 물건들이, 땅 디뎠던 모든 것들이 천장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천장에 부딪혀 마치 천장이 바닥인 양 붙어 널브러진다.

“중력 제어의 권능이죠. 세상이 갑자기 뒤집히는 기분인데, 당하면 멀미 나요.”

옆에 선 남자가 키들거렸다. 민하는 말을 잃은 채 천장에 붙은 사람들을 보았다.

민하와 이 남자, 두 사람만을 빼놓고 모든 것이 천장으로 떨어져 붙어버렸다. 사람도 물건도 전부 떠올라 주변이 텅 비었다.

텅 빈 공간은 정확히 원을 이루고 있었다. 민하가 선 자리는 그 원의 한가운데였다.

지지직! 지지지직! 지직!

선명해진 노이즈는 가라앉을 줄은 몰랐다. 두통이 일어나는 기분이라 민하는 소리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처음부터 서 있던 그 자리에 왕이 있었다.

그의 눈빛은 파랗게 타오르는 듯했다. 이쪽을 꿰뚫듯 노려보는 시선은 착각이 아니었다.

민하는 목을 죌 듯 다가오던 그의 손을 떠올렸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적의였다.

엉덩이로 깔아뭉갠 것 때문에 저런다 생각하기에는 저 시선이 너무나 강렬했다.

‘내가 그렇게 무거웠나?’

“역시 막강하십니다.”

옆의 남자가 왕을 향해 말했다. 하하, 잔웃음을 말 사이에 넣으며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 막강한 권능도 은의 레이디에게는 전혀 듣지 않네요.”

“은의 레이디라고 확정된 건 아니야. 상위세계에서 온 사람이란 걸 확인했을 뿐이다.”

오로지 그것뿐.

왕이 자신의 말을 꾹꾹 누르듯 말을 붙인 순간 노이즈가 좀 부드러워졌다.

천장에 붙었던 사람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다치지 않을 만큼 느린 속도였지만 천장에 올랐다 땅에 내려지는 움직임이 편할 리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균형을 잡느라 소란스러워졌고 그 가운데 옆의 남자가 민하의 손을 꼭 쥐었다.

“나는 엘 카이레스. 레스라고 불러요. 레이디는?”

이쪽을 보며 생글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확 뿌리칠 기분이 들지 않았다.

“서민하예요.”

“민하.”

나직이 그가 민하의 이름을 내뱉었다. 이름의 감촉을 확인하기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름도 예쁘다.”

‘그쪽 웃는 게 더 예쁘네요.’

어쩜 남자 웃는 얼굴이 이렇게 달콤할 줄은 몰랐다. 홀리지 않으려고 시선을 피하며 민하가 말했다.

“손, 놔주세요.”

“결혼해주면.”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예요? 난……!”

“혹시, 돌아가고 싶은 거예요?”

레스의 말에 민하는 소리치려던 말을 삼켰다. 그 사이 그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달콤함을 수려함으로 바꿔놓은 듯한 느낌이다. 보랏빛 눈을 살짝 좁히며 그가 말을 이었다.

“원래 있던 세상으로.”

“예!”

민하는 소리쳐 대답했다. 대답하고 나자 지금까지 상황에 휩쓸려 꺼내지 못한 당혹감까지 쏟아져나왔다.

“갑자기 이런 곳에 떨어져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요! 집에 가야 하는데……!”

“그럼, 가요.”

그가 민하의 손을 당기며 돌아섰다. 민하는 판단할 틈도 없이 그에게 이끌렸다.

그때였다.

뒤편이 소란스러워졌다.

등 뒤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소리가 덮쳐온다고 느낀 순간, 단단한 손이 민하의 어깨를 붙잡았다.

“으악!”

확 잡아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했다. 민하가 버틸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손을 놓친 레스가 뒤돌아보았다. 끌려간 민하는 뒤쪽의 누군가와 부딪쳤다. 누군가의 머리칼이 뺨에 와 닿으며 귓가에 서걱거리는 귓속말이 남았다.

“아무나 따라가지 마라, 이 멍청한 여자야.”

“뭐라고요?”

민하가 온 힘을 다해 상대를 밀어냈다. 밀어내긴 했지만 손목을 붙잡혀 다 벗어나지 못했다.

역시나 민하를 붙잡은 사람은 왕이었다. 사람들이 민하의 시선 한번 받으려고 웅성거리는 가운데 그는 홀로 차디찬 표정을 유지한 채 서 있었다. 아니, 차가우면서도 뜨겁다. 파랗게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여전히, 민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놔줘요!”

민하가 소리쳤다. 꽉 잡힌 손목이 아팠다. 레스도 그를 노려보며 외쳤다.

“이게 무슨 행팹니까? 당장 놓으시죠!”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노니,”

레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왕이 말을 꺼냈다. 하나도 간절하지 않은 어조로 그가 민하에게 청혼했다.

“나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