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말했잖아요. 연애 마중 나간다고. 짝사랑 배웅했으니까, 이제 연애해야지.”

지친 몸과 마음으로 찾아들었던 눈의 숲 설림리에서 빛을 발견한 카일 켄트.

6년 만의 재회, 그리고 4년의 기다림. 인내는 바닥났고, 드디어 성큼성큼 제 빛 장연우에게 다가서기 시작한다. 10년을 품어왔던 마음의 무게로.

“왜 여기 계셨습니까? 뭐 필요하십니까?”

사무적으로 밀어낸 말이 카일의 속삭임에 빨려들었다.

“장연우.”

“네.”

“장연우라고. 내가 필요한 게.”

2. 작가 소개

나자혜

느린 여행과 굽 낮은 신발과 승패가 가려지는 야구 경기를 좋아하며, 걷거나 뛰면서 글쓰기 노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기계가 발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홈페이지: www.lovenwisdom.com

트위터: www.twitter.com/lovenwisdom

▣ 출간작

아이스크림처럼, 레몬처럼

별의 바다

얼음불꽃

13월의 연인들

꿈꾸는 오아시스

우리들의 시간꽃

눈의 숲에서 봄을 만나다

3. 차례

#프롤로그

#01. 그해 겨울, 설림리

#02. Casta Diva

#03. 회색 우산

#04. 짝사랑을 배웅하고 연애를 마중하다

#05. 2년 전, 그 밤

#06. 불이 아닌 물로 내게 오라

#07. 직권 남용

#08. 달, 달, 살, 살

#09. 꽃, 입

#10. 붉은 새

#11. 와일드 체리

#12. 포식자

4. 미리 보기

침묵이 흘렀다. 뭉근히 달아오르며 가슴을 짓누르는 침묵이었다.

연우는 카일의 넥타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붉은 타이의 단정한 매듭이 완벽했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지금 이 상황과 대조적으로.

카일의 체온이 침묵을 물들였다. 저 사람도 나의 온도를 느끼고 있을까? 이 침묵 속에서?

이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궁금해하지 말아야 할 것을 궁금해하는 마음이 무서웠다.

연우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왜 여기 계셨습니까? 뭐 필요하십니까?”

사무적으로 밀어낸 말이 카일의 속삭임에 빨려들었다.

“장연우.”

“네.”

“장연우라고. 내가 필요한 게.”

가슴이 찰랑했다.

카일이 문을 한 손으로 짚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뻗어진 팔에서 열기가 훅 끼쳐왔다. 슈트 아래로 건장한 남자의 야생성이 느껴졌다.

비서실로 들어서기 전 했던 야릇한 상상이 다시 찾아들었다. 목덜미에 번진 열기가 볼까지 올라왔다. 달아오른 뺨을 들킬까 두려워 연우는 고개를 숙였다.

카일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속삭였다.

“4년 동안 말해왔어요. 나의 영특한 장 비서가 언제쯤 눈치챌까 기대하면서.”

이 사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4년이면…….

그녀가 카일의 비서로 근무한 지가 4년째다. 그중 2년은 약혼한 상태였고.

그렇다면…….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이제는 알아들었어요?”

카일의 음성이 위험스럽게 낮았다.

연우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알아들었냐고, 물었어요.”

카일의 깊은 목소리가 뜨거워진 공기를 꾹꾹 눌렀다.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말은 알아들었지만 말에 담긴 마음을 헤아리진 못하겠다. 눈앞이 아득하고 머릿속이 어지러울 뿐이다.

“모르는 거예요, 모른 척하는 거예요?”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정확히 뭘 모르겠다는 거죠?”

“사장님이 요즘 왜 이러시는지요. 지난 4년간 사장님은 완벽한 상사셨어요. 그 관계가 흔들리고 있어서 무섭습니다.”

“내가, 무섭다는, 말인가요?”

카일의 목소리가 떨리며 갈라졌다.

연우는 카일을 올려다봤다. 어두운 회색 눈동자에 물기가 일렁였다. 위압적이면서 동시에 더없이 연약해 보이는 눈이었다.

“나도 박 장관과 같은 부류의 남자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비서를 꼬여내 어떻게 해보려는?”

“그런 생각은 안 했습니다.”

“생각해야 할 거예요.”

“네?”

“장연우를 꼬여내서 어떻게 해보려는 게 내 의도니까.”

적나라하게 쏟아진, 수컷의 욕망. 이젠 무작정 피할 수만도 없었다.

“사장님은 박 장관 같은 부류의 남자가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카일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미소가 사라진 자리에 진지한 눈빛만 남았다.

“남자긴 해요?”

연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을 안 하는 건, 솔직할 수 없어서인가요?”

대화는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근무시간입니다. 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연우는 카일의 옆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카일이 다른 손도 문에 탁 짚었다.

“뭐가 마음에 들었어요?”

연우는 흠칫 놀라 카일을 올려다봤다.

“도대체 나의 어떤 점이, 어떻게 장연우의 마음에 들었을까? 점심 먹는 내내 궁금했어요.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2시가 되기만 기다렸을 만큼.”

충동적으로 밀어낸 말 두어 마디가 고고한 카일 켄트를 흔들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카일의 한 손이 내려와 그녀의 머리카락에 얹혔다.

“도대체 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었기에 그런 말이 나왔을까요?”

“대단한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말해봐요. 그 대단하지 않은 생각.”

연우는 어깨를 움츠렸다.

“추행 장면 목격하시고 김상희 사원에게 재킷을 주셨잖아요.”

“그런데요?”

“그 순간에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겁먹은 김상희 사원 내내 배려해주신 것도 멋있었고요.”

카일의 손은 멀어지기는커녕 그녀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다른 여자한테 옷 벗어주고. 다른 여자 챙겨주고. 그런 놈이 멋있어요? 취향이 독특하네요.”

아니. 말이 또 어떻게 그리 흘러가나? 연우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카일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돌았다.

“장연우.”

“네.”

“고백, 잘했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부드러운 목소리에 밴 열기. 어느새 웃음기를 거둔 카일의 눈빛이 뜨거웠다.

연우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떻게 자리로 무사히 돌아갈까 궁리하는데, 카일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한 번만 더 그러면, 본분을 잊은 사장을 상대해야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