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공주님이 잘 계시나 한 번 볼까?”'그 말과 함께 은근슬쩍 머리를 배에 올려놓으려는 승환을 밀어내며 은수는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그 전에 공주님이 먹고 싶다는 것부터 사다 주세요, 폐하.”'얼떨결에 맨바닥에 머리를 찧을 뻔했으나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 간신히 불상사를 면한 그는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그녀를 추궁하듯이 말했다.'“아낙아, 이게 무슨 짓이더냐!”'“어서요. 우리 공주님 배고프겠어요.”'은수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자 그는 금세 헤벌쭉해져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서 허겁지겁 외투를 걸치고 나왔다. '“우리 공주님, 아빠 돌아올 때까지 잘 있어.”'은수는 다정하게 말하고 현관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한 가지 사실을 일깨워 줬다.'“폐하, 차 키는 챙겨가요?”'차 키를 챙기지 않았다는 것에 100원을 걸겠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의외로 그에게 덜떨어진 면이 있음을 재확인했다. 신발을 신고 막 현관을 나서려는 그의 등 뒤에 그녀는 또 한 번 당부의 말을 건넸다.'“따끈따끈한 걸 먹고 싶으니까 꼭 식기 전에 와야 해요! 알았죠, 폐하?”'문을 열면서 그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그래, 아낙아. 노력해 보마.”'‘노력하는 게 아니라 꼭 그래야만 한다고요!’라고 말하는 은수의 목소리를 뒤로하며 그는 문을 닫고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B2층을 누르고 엘리베이터에 기댄 그는 곧 자기 연민에 빠졌다. 인간 도승환 29세. 어쩌다가 새벽 한 시에 임신한 아낙의 간식거리를 사러 집을 나서게 되었단 말인가. '임신하자마자 이때다 싶었는지 머슴 부리듯이 하는 아낙의 착취 하에서 돌쇠로 살아온 지 어연 5개월. 느닷없이 순대가 먹고 싶다고 하지를 않나, 철도 아닌데 귤을 구해 오라고 하지를 않나. 그것도 꼭 낮에는 아무런 말도 없다가 야심한 시각만 되면! 언젠가는 춘천 닭갈비가 먹고 싶다며 새벽 네 시에 사람을 깨워서 쫓아낸 적도 있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운전하면서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었다. '처량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제 볼록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면서 온갖 유세를 다 부리는 아낙이 그리 얄밉지만도 않으니 이게 요상한 일이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하강하던 엘리베이터가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승환은 반사적으로 엘리베이터의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14, 13……. 맙소사. '그는 12층에 다다르자 열리는 엘리베이터의 문 뒤편에 누가 있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단정하기 그지없는 머리카락과 최소한의 일렁임도 없는 검은 눈동자, 유리알처럼 얇은 동공과 무감정한 시선, 창백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새하얀 얼굴과 그 위에 떠올라 있는 무표정. '숨을 쉬고 있는지 의심마저 들 정도로 생기 한 점 없는 그 외양은 어느 모로 뜯어보아도 인간보다는 차라리 인형에 가까운 것이었다.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승환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기이할 정도로 똑바른 자세에는 마치 중심을 못으로 박아 고정시켜 놓은 것만 같은 그로테스크함이 있었다. '“여어, 악적K.”'불러도 역시나 알은체는 하지 않는다. 감정의 편린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눈동자로 한 번 이쪽을 바라보고는 조용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뿐이다. '새벽 한 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에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게 되었지만 두 남자는 전혀 이 상황이 놀랍지 않았다. 한두 번 정도라면 모를까, 일일이 놀라기에는 이미 둘은 지나치게 많이 마주쳐 버린 것이었다. 언젠가는 지하 주차장에서, 언젠가는 현관에서, 또 언젠가는 이렇게 엘리베이터에서.'“이번에는 무엇이더냐?”'그의 말에 지원은 1층을 누르며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제주도 흑돼지.”'“무난한 주문이로고. 이 몸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고구마스틱과 알감자구이, 그리고 호두과자를 사오라는 명령을…….”'거기까지 말하던 그는 돌연 떠오른 한 가지 가정에 굳었다.'“잠깐. 악적K, 너?”'“그래.”'제대로 미친 녀석. 승환은 헛웃음을 지었다. 병적일 정도의 결벽을 가지고 있는 녀석인 만큼 절대로 서연에게 아무 음식이나 먹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설마 제주도 흑돼지를 사러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몸소 날아갈 줄이야. 한결같이 서연에 한해서는 맹목적인 녀석이다. '“들레도 은근히 널 부려먹는구나. 천하의 도련님을 이 야밤에 흑돼지를 사러 제주도까지 가게 만들다니.”'“은수 씨도 만만치 않지.”'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일 테지만 오랜 친분―이라기보다는 악연―을 쌓아온 그는 지원의 얼굴이 미세하게나마 더 굳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에는 그 어느 것에도 흥미 없다는 모양새를 하고 있으면서 서연이 흉을 본다고 대번에 반응을 한다. '“누가 제 마나님 아니랄까 봐.”'딱 그 말을 했을 때 1층에 다다랐다. 엘리베이터를 나서는 지원의 뒷모습이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진동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것 때문은 아닌 듯했다. 서연 덕분에 때문에 과거의 트라우마는 어느 정도 극복한 듯했지만, 정신적인 원인을 배제하더라도 지원은 원래 추위를 잘 탔다. 여름에도 절대로 반팔을 입는 법이 없었으니. '“처량한 중생을 구제하는 것도 윗사람의 도리일 터.” '왠지 도와주고 싶어진 승환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 지원의 등 뒤를 덮어 주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리다 말고 지원이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자 그는 특유의 느긋한 얼굴로 이어 말했다.'“돌아오는 길에 반납하도록 해라.”'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닫히는 엘리베이터 사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지원의 시선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렇게 문이 거의 다 닫혔을 때, 승환은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들어 황급히 열림 버튼을 눌렀다.'“악적K! 잠깐 게 섯거라!”'그의 부름에 현관을 향해 걸어가던 지원이 몸을 돌렸다. '“거기 주머니에 중요한 것이 있도다. 내일 업무 보고 때 제출해야 하니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된다. 알겠느냐?”'‘업무 보고’라는 단어에 지원은 눈을 내리깔고는 자신에게 둘러진 외투를 흘긋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승환은 지원의 뒷모습에 대고 재차 당부를 했지만 실상 외투 안주머니에 있는 ‘그것’이 분실될 것이라고는 전혀 염려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황당하지만,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지원이 보관하고 있는 것이 더 잃어버릴 확률이 낮았다. 지원은 중증 결벽증에 완벽주의자이기까지 해 인간미는 없었지만 모든 일에 정밀기계처럼 철두철미했던 것이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힘과 동시에 틈새로 보이던 지원의 모습이 사라졌다. 지하 2층에 도달한 승환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방금 전 자신이 했던 행동을 후회했다. 5월인데 무슨 날씨가 이렇게 쌀쌀하단 말인가. 범상치 않게 서늘한 밤공기에 쫓기듯이 그는 후다닥 차에 올라타서 운전대를 잡았다.'“휴게소. 고속도로 휴게소의 고구마스틱과 알감자구이, 그리고 호두과자란 말이지.”'친애하는 아낙동무께서는 심지어 친히 어느 휴게소에서 무엇을 사와야 하는지조차 정해 주셨다. 이 오밤중에 꼼짝없이 휴게소 세 곳을 돌아야 할 판이다. 그는 음악을 틀어 놓고 속도를 냈다. 새벽이라는 것을 고려해도 고속도로는 놀랄 만치 한산해서 그의 주행을 방해할 장애물은 없었다. '150km 주변을 왔다 갔다 하고 있는 바늘. 제한 속도를 한참 벗어나 있었지만 그는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벌점이나 벌금을 부과할 간 큰 사람은 없었다. 이쪽을 찍어대고 있을 과속 카메라가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양심상의 문제였다. 이런 곳에 남용하라고 있는 공권력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