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아카데미 경연대회

에사모 학생들과의 만남 이후, 에리나는 시간이 날 때면 언제나 그곳으로 찾아가 함께 공부하고 수련하는 시간을 가졌다. 에리나와 이들의 관계는 점점 막역해져갔고, 친구가 생겼다는 기쁨이 에리나의 가슴을 뛰게 했다.

특히 마법 부 3학년 이든과 군사부 4학년 테이아와 노른, 그리고 물의 종족인 행정부 2학년 모네타와 부쩍 친해졌다.

“모네타, 이번 경연대회에서 내가 생각해둔 방향이 있는데 조언을 구해도 될까?”

에리나의 부드러운 물음에 모네타는 바로 마주보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답했다.

“물론입니다, 에르.”

모네타는 아시리아 대륙의 정세에 무척 밝고 행정지식에 해박해서 이미 1학년부터 행정부의 인재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인상과 말투 때문에 주변 학생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파란 눈과 머리카락은 아름다웠지만 무표정한 인상을 한층 차갑게 보이게도 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만 모든 것을 하려 해 그녀의 빛나는 능력은 가려져 왔다.

사실 그녀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 때문에 오해를 사고 있을 뿐이었다. 에리나는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를 기억했다. 정책 수업에서 언제나처럼 홀로 남은 그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었다.

“신경 끄시고 볼일 보십시오.”

함께 과제를 하기를 원하는 에리나에게, 모네타가 처음 던진 말이었다. 모네타는 학생들과 어울리려 할 때마다 매번 크고 작은 오해가 생겼기에 인간관계에 자신감이 없는 데다,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모네타는 언제나와 같은 딱딱한 말투로 에리나의 손을 냉정히 거절했다.

“저는 꼭 모네타 님과 하고 싶은데 안 되겠습니까? 제가 이번 과제와 관련해 고안한 정책에 대해, 모네타 님 같이 행정에 해박하신 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한번 보시고 결정해 주시길 청합니다.”

자신의 뾰족한 말에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배려해주는 이는 처음이었기에, 모네타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다음날, 모네타는 에리나가 고안한 정책에 대해 장점과 단점을 일목요연하게 분석하여 들고 왔다.

쾅!

엄청난 양의 자료가 에리나의 앞으로 무심히 내려놓아졌다. 주변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정도로는 아직 너무 부족합니다. 이것들을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럼, 이만.”

모네타는 이 말만을 남기고 잽싸게 모습을 감췄었다. 그러나 뒤돌아서는 그녀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후, 모네타는 에사모에 가입하여 자신이 단점이라 생각하는 것들을 하나씩 극복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경연대회와 관련한 에리나의 계획을 한참 듣던 모네타가 입을 열었다.

“에르 님은 정말 언제나 제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보시는 분입니다. 대단하세요.”

에리나는 그녀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자신과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 정말 기뻤다. 그녀는 무엇이든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곧은 사람이었다.

“고마워, 모네타. 그런데, 언제쯤 날 더 편하게 대해줄 거야? 우리, 친구 맞지?”

에리나의 말에 모네타가 한껏 당황해하며 말했다.

“물, 물론입니다! 에르 님은 저의 제일 친한…!”

여기까지 말한 모네타는 콜록거리며 마른기침을 해댔다.

“그만 괴롭혀, 에르. 모네타에게 그 이상 들이댔다간 송장 치르겠다.”

옆에서 지켜보던 노른이 무시무시한 말을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옆에서 일련의 대화를 듣고 있던 테이아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알겠어 노른. 모네타 그만 괴롭힐게. 다니엘, 우리 아카데미 경연대회 멤버는 이 인원으로 확정된 건가?”

에리나가 다니엘을 돌아보며 물었다. 에사모 회원들은 모두 에리나와 함께 경연대회에 나가길 원했는데, 오늘은 그들 중에서 선발된 실력자들이 모이는 날이었다.

“네, 에르 님. 인원은 이것으로….”

쾅!

바로 그때, 다니엘의 등 뒤로 문이 부서져라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들어간다.”

갑작스러운 카이저의 등장에 에리나를 제외한 방 안의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리나는 못 말린다는 얼굴로 카이저를 보며 말했다.

“카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네 생각보다 나는 너에 대해 관심이 많다.”

당당한 카이저의 말에 에리나는 할 말을 잃었다.

카이저의 말을 들은 모네타가 소리쳤다.

“너, 너무 집착하시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지만, 항상 따라다니시는 것도 모자라 갑자기 이런 무례라니요.”

모네타의 외침에 카이저가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

“왜, 왜 그렇게 보십니까?”

모네타는 그동안 카이저를 먼발치에서만 바라만 봤지,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의 기세에 움츠러들긴 했지만 그녀에게는 에르의 의사가 더 중요했다.

“아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에르를 위해 힘써주도록.”

카이저의 말에 방 안의 모두가 황당함에 입을 떡 벌렸다. 마치 황족이 자신의 안주인을 챙기는 듯한 말투였다.

“카이, 그만해. 다들 오해하면 어쩌려고 그래. 너는 나의 친우이니 원한다면 함께해도 좋아. 하지만 이 사람들 또한 나의 친구야. 예의를 갖춰줘.”

“알겠다.”

에리나의 말에 카이저가 군말 없이 답했다. 카이저의 순순한 모습을 본 다니엘과 군사부의 노른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군사부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카이저의 실력과 분위기에 겁에 질려 말도 붙이지 못했다.

그는 짐승같이 살벌한 눈빛만으로도 목이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을 주곤 했다. 그런 자를, 에르는 너무나도 손쉽게 인간의 영역으로 들였다.

“카이 지엘로건이다. 앞으로도 에르를 잘 부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르의 가장 가까운 자는 나라는 걸 알아 두도록.”

카이저는 방 안의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경고하는 시선을 주었고, 특히나 남자들에게는 살벌한 시선을 보냈다. 이렇게 카이저와 에사모 회원들이 살 떨리는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활짝 열린 문으로 금빛의 한 사내가 가볍게 걸어 들어왔다.

“누가 또 왔네요.”

테이아가 조용히 그의 존재를 알렸다.

“안녕하십니까, 에르 님. 이곳에서 재미있는 모임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저도 에르 님과 함께 할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갑작스러운 아론 황태자의 등장에 일순 방 안에 있던 모두가 얼어버렸다.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진다 했더니, 너였군.”

카이저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아론을 노려보았다. 지난번 에리나가 아론을 만나고온 후로 더 그를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기에 카이저는 그의 존재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었던 원인이었다. 제까짓 게 에리나를 쥐고 싶어 하는 것이 보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꺼져라.”

카이저가 딱 한마디를 던졌다. 그러자 아론이 카이저에게 다가가 웃으며 속삭였다.

“제가 이미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아실 텐데요? 베르크의 황제폐하.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곁에 두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론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이저는 순식간에 에시메드를 꺼내 그대로 내리그었다.

“!!!”

아론이 입고 있던 신학 부 제복의 목 근처 자락이 잘려 떨어져 내렸다. 살기에 예민한 에코와 아이리스 자매가 이에 반응하여 몸을 떨었다.

‘역시, 보통사람이 아니야.’

지켜보던 에리나가 천천히 일어나 신경전을 벌이는 둘에게 다가갔다.

“두 분 전쟁이 하고 싶으신가봅니다. 저희는 평화 동맹인데 두 분은 모임취지에 맞지 않으니 나가세요.”

“에르 님, 저는….”

아론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에리나는 가볍게 마법으로 그들을 문밖으로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출입문을 강철로 바꿔버린 후 자물쇠를 걸었다.

“자, 그럼 이어서 회의를 해볼까요?”

에리나가 에사모 회원들을 돌아보며 상큼한 눈웃음을 날렸다. 방금 전까지의 살기 넘치던 공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안에는 청명한 숲의 마력만이 남아 신경전에 시달리던 사람들의 지친 심신을 달래주었다. 지켜보던 모두는 한결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역시 우리 에르 님이 최고야….’

**

아카데미 경연대회의 멤버를 확정한 후, 에리나는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카데미 준비 이외에도 하델리히와 계속 마력과 신성력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지만, 고문서의 해석 이후로는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카이저의 종족은 평생 대지의 여신의 저주를 안고 살아갔지만, 실상 그도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의 조상들이 그랬듯이 그저 숙명이라 여기고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신성제국의 황태자라면 마력과 신성력을 하나로 만드는 방법을 알지도 몰랐다. 에리나는 이 힘을 깨달으면 신탁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자꾸 들었다.

그랬기에 에리나는 고심하다 아론을 경연대회의 동료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카이저는 마음에 들지 않아했지만 그를 설득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조건이 하나 있었다.

“이제부터 매일 너와 잘 거다.”

카이저가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아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던진 말이었다. 매일 기숙사에 올 거라는 그의 선전포고였다. 이 말을 하는 카이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보였다.

“카이저, 꼭 그걸…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어?”

에리나는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아 카이저의 눈길을 피했다. 카이저는 그저 대답 없이 에리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카이저의 얼굴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것이, 지난번 아론과 함께 에사모 방에서 쫓아낸 것에 아직도 뿔이 나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 에리나는 그만 웃음이 나와 버렸다.

“후후, 카이저 표정 좀 풀어.”

에리나의 웃는 얼굴에 카이저의 표정이 또, 속절없이 풀어졌다. 그녀를 보면 웃음이 절로 나왔고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모든 것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그녀에게 너무 약했다. 카이저는 문득 얼마 전 페레그린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폐하, 물론 제가 조심스럽게 다가서라는 충언을 드리긴 했지만 요즘 너무 무르신 것 같습니다. 아론 황태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브렌체스토 공작도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구요. 저희 황후님은 언제쯤 모실 수 있겠습니까?”

에리나의 모습을 보니 이대로라면 평생 자신을 따라 와주지 않을 것 같았다. 에리나를 매일 생각하듯, 에리나 또한 자신을 생각해 주길 바랐다. 순간, 카이저는 그녀의 기억에 확실히 자신을 각인시켜야겠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는 곧바로 마력 봉인 석이 달린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커다란 붉은 늑대로 변했다.

“카, 카이저? 갑자기 왜 변한거야?”

카이저가 늑대로 변하는 모습을 처음 본 에리나가 놀라서 발을 헛디뎌 침대위로 넘어졌다. 그 위로 카이저가 사뿐하게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에리나의 볼을 시작으로 몸 여기저기를 핥고 입을 맞춰댔다. 할짝거리는 소리와 함께 에리나의 몸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윽, 카이저! 내 몸에 손대지 않기로 했잖아!”

그러자 카이저가 만족스러운 눈을 하고 말했다.

“같이 자는 걸 허락한 건 그대다. 사람의 모습이 부담스러울 것 같아 이 모습으로 변한 건데, 원한다면 다시 바꾸겠다.”

이렇게 말하며 카이저가 자신의 큰 얼굴을 에리나에게 들이밀며 비비적거렸다.

“늑대의 모습인 나는 손대지 않기로 하지 않았으니 계약 위반은 아니다.”

카이저가 덤덤하게 말하며 에리나를 제 품에 꼬옥 안았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이 변태 늑대!”

에리나가 부드럽게 그의 품을 빠져나와 카이저의 머리에 강력한 꿀밤을 한 대 날렸다.

“윽!”

에리나의 매서운 손길에 카이저는 풀이 죽어 침대 구석으로 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카, 카이저… 많이 아파?”

에리나의 부름에도 카이저는 미동도 없었다.

‘내가 너무 심했나?’

에리나가 카이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미안해 카이저. 너무 놀라서 그랬어. 네가 무섭거나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래도 카이저는 반응 하나 없이 잠잠했다.

“카이저…?”

에리나가 더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만졌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언젠가 닿았던 그의 머리카락처럼 부드러웠다. 에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르르르.

카이저가 숨을 몰아쉬는가 싶더니, 곧 에리나를 덮쳐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아앗!”

에리나는 이제 카이저의 품안에 꼼짝없이 갇힌 모양새가 되었다. 카이저의 품에 깊숙이 안겨있으니, 거세게 두근거리는 그의 심장소리가 여과 없이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에리나의 심장도 그의 고동 때문에 덩달아 빨리 뛰는 것 같았다.

“이건 그대가 먼저 만진 거니 할 말 없을 거다. 그럼 난 너무 피곤해서 이만 자야겠어.”

“카이저, 이거 놔줘야지! 카이저!”

카이저는 에리나의 외침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에리나는 한참을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쓰다가 그냥 카이저의 배에 편하게 드러누워 버렸다. 그에게서 벗어나려면 마법을 쓰면 될 일인데, 저주로 인해 늑대 모습인 카이저를 볼 때면 왠지 모르게 한없이 약해졌다.

“휴… 난 몰라. 내가 잠드나봐라!”

그러나 에리나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간 쌓인 피로에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했다. 얼마 안 가, 그녀는 카이저의 부드러운 품에서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에리나는 카이저를 그대로 두고 잤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