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아 씨, 제일정밀 납품목록 가져와요. 그리고 유 차장 있으면 그만 퇴근하라고 해요.]'“네, 실장님.”'대답을 앞질러 찰칵 소리가 들렸다. 조금 멍해 있는데, 뚜 하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현아는 서둘러 수화기를 내리며 통화 내내 가슴 속에 뭉쳐두었던 숨을 조심조심 풀어냈다. 숨과 함께 긴장이 빠져나간다. 가슴에서 갑갑함이 사라질 때쯤에야 겨우 주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 줄로 가지런히 배치된 책상들이 주인 성격을 따라 깔끔하게 또는 대충대충 정리된 채로 버려져 있다. 퇴근시간이 지난 기획실은 언제나처럼 조금 휑하고 쓸쓸하다. 남은 사람은 실장이 말을 전하라고 한 유문현 차장뿐이었다. 그는 한쪽 구석에서 비서과 오성미 선배와 간간이 웃음소리를 내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유 차장님, 실장님이 퇴근하셔도 좋답니다.”'싱글벙글하는 얼굴로 돌아본 유 차장이 알아들었다는 듯 손을 들었다. 그는 성미선배에게 몇 마디 더 말을 건네고 자기 자리로 움직여 주섬주섬 뒷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성미선배는 가지 않고 가까운 의자에 주저앉았다. 유 차장을 기다리려는 모양이다. 두 사람이 사귄다는 소문은 정말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현아는 사무실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서류 캐비닛으로 다가갔다.'가득 들어찬 파일들 속에서 지시받은 제일정밀 서류를 찾고 있는데, 뒤에서 덜컹하고 서랍 닫는 소리와 함께 유 차장이 말을 건넸다.'“가랄 때 가야지. 현아 씨는 안 가?”'“네, 실장님이 찾아달라는 서류가 있어서요.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책상을 잠그고 가방 드는 소리에 이어 유 차장의 퇴근인사가 들려왔다.'“그럼 먼저 갑니다. 수고해요.”'“들어가세요.”'반사적으로 인사를 되돌리면서 무심코 돌아보았다. 문 옆에 선 성미선배가 눈에 띄었다. 유심히 쳐다본다. 괜히 가슴이 내려앉았다. 대학 선후배라는 인연으로 3년여 전 입사했을 때부터 늘 알게 모르게 챙겨주던 사람이었는데, 요즘 들어서 현아를 보는 눈빛이 이상했다. 영문도 모르면서 어쩐지 거북하다. 모른 척 서류 캐비닛으로 다시 얼굴을 돌리면서도 뒤통수가 근질근질했다. 귀가 쫑긋 선다.'“많이 기다렸지? 미안해. 약속이 홍대면, 시청 앞에서 내려주는 게 좋을까?'“안 그러셔도 되는데.”'“괜찮아. 어차피 가는 길이야.”'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무실을 나가는 두 사람을 곁눈질하면서 살며시 한숨을 쉬던 현아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아찔해져 하마터면 애써 골라놓은 서류철들을 떨어뜨릴 뻔했다.'‘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