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이별이 인사

“어머니, 제가 너무 늦었죠?”

“늦긴. 아이고, 그 짐 보따리는 뭐니, 무비야?”

한눈에 보기 힘들 정도로 넓은 거실. 젊은 여자가 양손에 터질 듯 빵빵한 장바구니를 들고 뛰어 들어왔다. 그에 황금빛 해바라기 자수가 놓인 소파에 누워 있던 중년 여인이 벌떡 일어나 젊은 여자의 손에 든 장바구니 하나를 잡아 들었다.

“세상에, 이 무거운 걸 왜 들고 와. 아줌마를 불러야지.”

“괜찮아요. 이 정도는 들 수 있어요, 어머니.”

“그나저나 오늘 무슨 날도 아닌데 장을 이렇게 많이 봐 왔어?”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그런데 어머니, 오늘 골프장에서 라운딩하신다고 안 하셨어요?”

“멤버들이 술병 났다고 펑크 냈어. 참 그 사람들도 어지간해. 남편들 스폰질 하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 받는다고 술 마셔서 몸 망치면 누가 손핸데. 안 그러니, 무비야?”

“위로받을 게 술밖에 없으셔서 그런 거죠. 어머님도 그 마음 잘 아시잖아요.”

“너무 잘 아니까 그렇지. 그래서 내가 이 경지까지 오른 거 아니니. 아휴, 무거워. 아줌마! 아줌마!”

“오늘 안 오시는 날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일찍 온 거예요.”

“그랬나? 무비야, 우리 가정부 두자. 가정부 월급 내가 낼게. 응?”

“음……. 어머니, 이런 일 때문에 가정부 두면 어머니 집 안에서의 최소 운동량도 없어지는데 그럼 건강에 지장 오세요.”

“으이구, 알았어. 암튼 본전도 못 찾는다니까.”

누가 보아도 사이좋은 고부였다. 분홍색 니트 홈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인은 중년인 듯했으나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외모의 소유자로 며느리와 나누는 대화에는 따뜻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식탁 위에 장바구니를 올려놓은 며느리 무비는 싱크대로 가 손을 씻고는 주방에 걸려 있는 앞치마를 찾아 목에 걸었다.

“무비야, 숨 좀 돌리고 하렴. 내가 차 한 잔 타 줄게. 응?”

“아니에요. 어머니, 차 드시고 싶으세요? 제가 타 드릴게요. 어머니, 밀크티 드시겠어요?”

“됐다, 얘. 나 혼자 무슨 맛으로 마시니? 낮잠이나 잘랜다. 아니면 내가 도와줄까, 무비야?”

“아뇨. 가서 주무세요. 오늘은 제가 저녁상 차리고 싶어서 장 봐 온 거니까, 다 되면 어머니 깨워 드릴게요.”

“알았어. 그럼 꼭 깨워야 한다.”

“네.”

내년이면 환갑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가벼운 걸음으로 주방을 빠져나가는 시어머니. 그 뒷모습을 보는 며느리 무비의 얼굴에 어린 미소는 어쩐지 힘이 없었다.

5년 전, 그녀가 결혼해 이 집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그리고 그녀 이전의 7명의 예비 며느리들이 이 집안의 며느리 자리가 걸린 시험을 치르기 위해 들어와 살았던 몇 년 동안을 제외하곤 집안일이란 건 한 적 없던 시어머니.

무비가 장바구니에서 꺼내 든 것은 시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물김치를 하기 위해 사 온 가을 배추였다.

사 온 것들을 모두 식탁 위에 펼친 무비는 시간이 벌써 오후 3시인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오늘 만들 것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빠르게 준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저녁 8시.

다섯 시간 동안 간간이 물 마실 때 빼고는 쉬지 않고 만든 결과물들이 길고 큰 식탁 위에 차려졌다.

그녀가 다섯 시간 동안 차린 저녁상은 한정식집 밥상을 방불케 했다. 자리마다 잡곡밥과 된장찌개에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굴비와 삼색전, 오채와 해파리냉채 그리고 단호박갈비찜과 배추물김치에 고사리, 도라지, 시금치나물까지 차려진 식탁을 보며 만족한 듯 무비는 다섯 시간 전보다 더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주방 밖 거실에 모여 있는 식구들을 불렀다.

“식사하세요.”

그녀가 차린 상은 잔칫상이었지만 막상 식탁 위에 앉은 사람들은 세 사람뿐이었다. 그녀의 시부모인 권열구 회장 부부와 남편 권세주는 어여쁜 정원 같은 식탁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가, 오늘 누구 생일이냐?”

“그러게. 무비 씨, 누구 생일이야?”

“아뇨. 제가 오늘 우리 가족들과 맛있는 저녁 한 끼 먹고 싶어서 지갑 좀 넉넉하게 열었어요.”

“그래? 아주 환영할 만한 소빈데, 너 혼자 이걸 다 만든 거냐? 네 엄마 도움도 안 받고?”

“혼자 해 봐야 솜씨가 늘잖아요. 아버님, 맛 좀 봐 주세요. 제가 다녀 본 식당 중에 가장 맛있는 집을 흉내 내 보려고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세상에, 무비야, 이 잡채 너무 맛있다. 내가 맛집은 한정식집으로만 가는 거 알지? 그 한정식집에서 먹은 잡채보다 더 맛있어. 이 배추물김치도. 어쩜 이렇게나 내 입맛에 딱 맞니!”

5년의 결혼 생활을 통해 무비가 터득한 시댁 식구들의 식습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시아버지 권열구 회장과 남편 권세주는 말문을 닫고 먹는 데만 열중하는 반면 시어머니 박혜자는 입을 안 쉬었다. 한결같은 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는 무비의 표정은 의미 모를 씁쓸함으로 가득했다.

각자 앞에 차려진 밥상을 비워 가는 사이 그녀는 양을 조금씩밖에 차리지 않은 자신의 밥상을 비우고는 식구들이 후식으로 먹을 차와 과일을 준비했다. 식사를 마친 시부모와 남편의 표정이 행복한 포만감에 젖어 있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예쁘게 세팅된 차와 과일을 시아버지 자리부터 차례차례 앞에 놓았다.

“요즘 세상에 이런 저녁 먹기 힘들다는데……. 고맙다, 아가.”

“나도 고마워, 무비야. 네가 만든 건 돈 주면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는 것들이지만 네 정성은 돈 주고 사 먹을 수 없는 것이잖니. 하나같이 어쩜 내 입맛이니……. 오늘이 꼭 내 생일 같구나.”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맛있었어, 무비 씨.”

“고마워요. 자아, 그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세 분 모두 감도 못 잡으신 것 같으니까 제가 말씀드릴게요. 오늘이 정확하게 제가 세주 씨와 결혼한 지 만 5년 되는 날이에요. 이제 기억나세요?”

5년이라는 숫자에 시아버지 권열구 회장과 남편 권세주의 얼굴빛이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너무 놀라실 건 없으세요. 오늘 5년이 되었다고 해서 제가 어떤 선물을 바라는 건 아니니까요. 오히려 제가 선물을 드려야 하는데 오늘 저녁은 애피타이저고요, 진짜 메인 선물은 내일 아침이면 받으시게 될 거예요.”

“아니, 당신 얼굴이 왜 그래요? 얘들 결혼 5주년인 거랑 당신이라 무슨 상관이 있다고? 혹시 나 모르는 일이 있어요?”

“아냐! 무슨! 흠흠. 그래, 벌써 5년이 되었구나. 네가 내 며느리가 된 게……. 참 세월 한번 빨리 갔구나. 세주야, 넌 5주년인데 아무것도 준비 안 한 게냐?”

“생각도 못 했어요. 무비 씨랑은 매일매일이 신혼 같아서요.”

“흠흠. 5년이 되도록 손주 소식 한 번 안 전해 주는 놈이 거짓말은……. 아가, 네가 준비했다는 선물이 뭔지 궁금한 건 둘째치고 나한테 받고 싶은 선물 있으면 말해 봐라. 네가 바라는 건 내가 다 해 줄 테니.”

“아버님, 그 말씀만으로도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바라는 건…… 제가 바라는 건, 내일 제 선물을 부디 거절 말고 받아 주셨으면 하는 것뿐이에요.”

“정말 궁금하네. 무비야, 나한테만 말해 주면 안 되겠니? 응?”

“어머님, 죄송해요. 선물은 비밀이어야 효과가 크잖아요.”

“며느리한테 처음 받아 보는 선물이니 참고 기다려야지. 당신 뭐 해요. 다 마셨으면 방으로 가자고요. 눈치 없이 애들 붙잡고 있지 말고.”

“알았어. 알았어.”

결혼 5주년이란 말에 분위기가 경직된 것을 못 견딘 건 언제나처럼 시어머니 박혜자였다. 다과 쟁반을 손에 들고 시어머니가 남편 권 회장을 이끌고 거실을 떴다.

차를 마시려 찻잔을 드는 무비의 손을 세주가 저지했다.

“그 차를 마실 만큼 밥을 많이 먹은 건 아니잖아.”

“보셨어요?”

“그럼 안 보나? 정신없이 젓가락질하고 있는 사람 옆에서 깨작거리고 있는데?”

“음식 만들다 보니 배가 불러서 조금만 먹은 거예요.”

“알아. 그래서 그 차 다 마실 거야?”

“아뇨.”

“그럼 올라가자.”

“네.”

거부한 적 없었다. 이 남자 권세주의 요구를 그녀는 결혼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거부하지 않았다.

2층, 지난 5년간 그녀가 내 집이라 생각하고 살았던 침실에 들어섰다. 습관처럼 욕실로 들어가려 하는 그녀를 세주가 잡아 세웠다. 뒤에서 안은 채로 그는 무비를 화장대 거울 앞에 세웠다.

“당신 향기 맛있네.”

“샤워하고 올게요.”

“아니. 지금은 이대로가 좋아. 자아, 말해 봐. 왜 난데없는 결혼기념일 타령인 건지.”

“그냥요.”

“거짓말. 아니잖아. 뭘 알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아뇨. 몰라요.”

“내가 5년 동안 살아온 당신은 거짓말을 하는 여자는 아니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말을 하는 여자도 아니지.”

“그래요.”

그 사람으로 인해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됐다. 자신이 어떤 남자와 결혼하는지에 대해 간략한 프로필만 받고 친구들의 결혼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혼을 하게 됐다.

올림머리를 한 그녀의 뒷덜미에 숨을 불어넣으며 앞치마를 벗기고 원피스 지퍼를 내리는 이 남자. 권세주.

5년 전 오늘, 그녀는 자신과 5년 동안 같이 살 남자를 결혼식장에서야 보았다. 처음 본 그녀의 남편이란 남자는 큰 키에 검정색 결혼예복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무비는 친구들로부터 부러움과 시샘의 대상이 될 정도로 연예인 이상으로 잘생긴 오빠 둘을 보면서 자랐다. 게다가 허구한 날 젊은 남자 연예인들을 침대로 끌어들였던 그 사람으로 인해 남자의 얼굴에 한해서는 면역력을 자부했던 그녀였다.

쌍꺼풀도 없고 조각 같은 콧날도 아니고 더욱이 무표정한 얼굴에 몸이 얼어 버릴 것만 같았는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잘생겼다’는 것이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뜻이었나 봐요.’

“너무 맛있는 향기가 나서 내가 당신을 다 먹어 버리면 어떡하지?”

“다 먹을 수 있다면 나를 양보할게요.”

“정말 후회 안 하지?”

“그래요.”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말해 줘야 하는데,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안기고 싶은 내 마음이 자꾸 가로막네요. 5년 전 첫날밤처럼 당당하고 싶은데…….’

***

친구들이 꿈꿨던 5성급 호텔 예식장에서 예식을 마치자 여느 결혼식처럼 처음 보는 양가 부모님과 촬영을 하고, 또 처음 보는 직장 동료들, 친구들과의 촬영까지 마쳤다. 이어 폐백까지 마친 뒤 그녀는 호텔 옥상에 대기하고 있던 헬기를 타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제주도 호텔 착륙장에 도착해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룸에 들어섰을 때에야 그녀는 남자와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벙어리는 아닐 테고.”

“네.”

“사진으로 본 것보다 동안이네. 아니, 스물아홉치곤 너무 어려 보여.”

“그래서 싫으세요?”

“싫고 좋을 게 뭐 있나? 결혼까지 한 처지에. 내 취향이 로리콤은 아니라는 걸 알려 준 것뿐이야. 당신 복숭아같이 맛있게 보이는데 .”

“배고프세요?”

“배도 고프고 술도 고프고. 신혼부부라고 저렇게 세팅도 해 놨는데 한잔할까?”

“네.”

“난 말 많은 여자 안 좋아하지만 말 짧은 여자도 안 좋아해.”

“긴말 필요로 하는 대화가 아니잖아요.”

“그런가? 얼굴은 복숭안데 말투는 레몬이라……. 이거 참 재밌네. 자, 어쨌든 우리 오늘부터 시작인 부부니까 한잔하자고.”

“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어느새 한 병이 바닥났다. 그리고 마침내 두 병이 되었을 때 표정도 말투도 변화가 일지 않았던 그날이 그녀의 등줄기에 키스하며 마지막 속옷마저 벗겨 버리는 남편의 손길 아래 지금인 양 그녀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부부라는 게 뭔지 알아?”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알려 드릴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신부 같아서 그래. 자아, 안다니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 당신 나에게 몇 번짼지 알고 있어?”

“네. 일곱 번 약혼하고 일곱 번 파혼하셨다고 들었어요.”

“맞아. 그걸 알고 있다면 그리고 부부라는 게 뭔지도 알고 있다면 말하기 쉽겠어. 난 일곱 번 약혼하고 파혼했는데 그 여자들과 섹스한 적은 없어. 그리고 모두 우리 집에서 최소 3개월을 살았는데도 그 여자들의 손 한 번 잡아 본 적도 없어. 왜냐고? 그 여자들은 내 아내가 아니니까.”

“경험이 없다는 말인가요?”

“아니. 정해진 가격을 가진 여자들만 안았을 뿐이야. 아내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여자를 성욕 때문에 책임질 순 없잖아.”

“…….”

“하지만 아내는 다르지. 그것도 법적으로까지 완벽한 아내는 말이야.”

“저와 섹스하겠다는 걸 그렇게까지 돌려 말할 필요 있나요?”

“당신 이름이 최무비 맞지?”

“그래요, 권세주 씨.”

“당신 마음에 들어.”

“다행이네요.”

“완벽하게 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당신 몸을 아는 남자,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는 돼? 그보다 가장 당신 몸을 황홀하게 해 줬던 남자가 몇이나 돼?”

그 사람은 셀 수 없을 것이다.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남자가 바뀌었던 그 사람은 그럴 테지만 그녀는.

“그 황홀한 느낌이라는 거 이제부터 경험해 보려고 하는데요. 안 될까요?”

“맙소사, 그 여자 딸이? 의외네.”

너무 익숙한 말인데 그의 표정과 말로 인해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몸까지 내 마음에 들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약속해.”

“뭘 약속해요?”

“나로 시작한 당신 몸, 나로 끝낸다고.”

“그게, 무슨 뜻…….”

“당신 몸, 나에게만 허락해야 한다는 뜻이야.”

“언제까지요?”

“우리가 부부인 동안.”

“알았어요.”

“건배하지. 우리의 첫날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