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후궁) 3권 (완결)
체념(후궁) 3권 (완결)
체념(후궁) 3권 (완결)
3권 목차


21. ~ 31.
체념(후궁) 3권 (완결)
21.



*****

격한 반가움이 끝나니 달라진 이령의 행색과 그녀와 같이 온 사내가 궁금한 주인이었다. 천으로 된 옷을 입어도 숨겨지지 않던 이령의 귀티가 비단옷을 입으니 다가가기 힘들 만큼 위엄있었다.

“…그게.”

“서방입니다.”

무어라 칭해야 할지 난감해 하던 이령의 귀로 윤의 음성이 들렸다.

“어머! 영이 혼인했어! 그래서 그리 사라진 거야. 축하해! 이럴 게 아니라 내가 고기 더 가져다줄게.”

갑작스러운 축하 인사에 이령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와의 관계에 대해 물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장터를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별일이 없었으니까.

그가 서방님이라는 호칭을 쓰라 했을 때 설마하니 누군가에게 그런 호칭을 알게 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서둘러 주방으로 향하는 주인을 보던 이령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알아서 좋을 호칭이 아니었다.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해도. 황제와 후궁의 얼굴엔 관심도 없는 곳이라 해도 말이다.

“뭐 하러 말씀하셨습니까. 그냥 얼버무리면 될 일이었습니다.”

“맞는 말을 한 것뿐이다.”

“맞긴 뭐가 맞습니까. 일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민가에선 후궁이 어떤 의미인지.”

젓가락으로 수육을 집은 이령이 새우젓을 찍어 입에 넣었다. 심란함 속에도 불구하고 고기는 참으로 부드럽고 고소했다.

윤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오물오물 고기만 먹던 이령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영훈아.”

!

눈까지 반달로 접은 이령이 서책에 적었던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윤은 그도 모르게 쥐어진 주먹을 아래로 숨겼다. 그녀가 이토록 반가워하는 이가 누구인가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윤은 그대로 굳었다.

“영이 누나!”

8살 정도는 되려나. 작은 사내아이 하나가 무척 반가운 얼굴로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이령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키가 컸다, 발음이 정확해졌다 등의 말을 했다. 아이는 자신은 이제 사내라며 허리에 손을 올리며 섰다.

글공부는 잘하고 있는 것인지. 어려운 것은 없는지 묻던 이령이 보자기에 쌌던 서책을 꺼내 들었다.

“아직은 어려울 수 있으나 이것은 반드시 읽어야 할 서책이다.”

“나는 아직 아기야.”

“방금은 사내가 되었다 들었던 것 같은데. 그건 김영훈가 아니고 박영훈인가.”

“힝.”

시무룩한 얼굴의 아이를 보던 이령은 기어이 손에 서책을 들려주었다.

“다음번에 올 땐 다른 책을 선물해 주마. 글공부를 늘 가까이해야 한다.”

마지못해 서책을 안아 든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령은 장터에서 샀던 간식 꾸러미도 하나 안겨 주었다.

“어머니 몰래 먹거라. 하루에 하나씩.”

“응!”

간식에 혹한 것인지 서둘러 집 안으로 간식을 숨기러 들어간 아이를 보는 이령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윤의 머릿속에 떠나보낸 아이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가 사산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이의 출산 준비로 바빴을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우리는 어땠을까.

솔직히 그려지지 않는 미래였다. 아이는 황후궁에서 클 것이니 더욱 그랬다. 아이가 차별을 당할까 두렵다던 이령의 말은 충격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상황이니 이령의 불안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아이를 잃어 오히려 다행이라 말하던 이령 앞에 말문이 막혔다.

이령이 그를 더는 연모하지 않는 것 또한. 모든 게 제 탓이라 다시 연모해 달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는 현실이었다.

국밥 주인은 한사코 계산을 거절했다. 서책 한 권이면 수육보다 몇십 배는 비싼 것이라고. 그럼에도 이령은 계산을 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장터를 나와 말이 있는 곳에 다다르니 밝았던 조금 전과 달리 하늘 위엔 잿빛 구름이 가득했다.

“폐하, 비가 올 것 같사옵니다. 이만 행궁으로 돌아가시지요.”

비안이 몰려드는 비구름에 돌아갈 것을 청했다. 이대로 산속으로 들어간다면 내려오는 길이 위험할 거였다. 어느새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 낼 것 같이 어두워졌다.

“폐하, 먼저 돌아가셔도 됩니다. 신첩 혼자 다녀와도 되는 곳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걷던 길이라 이령은 괜찮다 말했다. 큰비만 아니라면 걸어갈 만한 거리였다. 이곳까지 온 이상 그냥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혼자라도 다녀오겠다는 이령의 말에 표정을 굳힌 윤은 말에 올라 손을 뻗었다.

“같이 가자.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

하늘에선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내렸다.

말 그대로 폭우였다.

쫄딱 젖은 상태로 마을에 도착한 윤과 이령이었다. 이석이 미리 신경을 써 둔 것인지 오래 비워졌던 공간엔 장작과 물이 채워져 있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묵어야 할 것 같구나.”

비안과 이야기를 나누고 온 윤이 젖은 겉옷을 벗었다.

“송구하옵니다. 신첩이 괜히 고집을 부려서.”

이령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비가 이 정도로 올 줄은 몰랐다. 여름이라 의례적으로 오던 비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양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 혼자 산에 올랐다면 몇 시간을 걸려 왔을 거였다. 그나마 말을 타고 와 빠르게 도착했다.

“짐이 오겠다 한 것이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윤이 이령의 젖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여름이라는 계절을 잊은 듯 산속은 기온이 낮았다. 거기다 비까지 오니 이대로 있다가는 꼼짝없이 고뿔에 걸릴 게 뻔했다.

“우선 씻어야겠다. 이대로 있다가는 고뿔에 걸릴 것이야.”

“아! 물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차 하는 표정으로 이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가마솥과 욕조를 오갔다. 혼자 움직이는 그녀를 도와 윤이 같이 물을 날랐다.

황궁의 욕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작은 욕조였다.

“이 정도면 되지요?”

물을 가득 채워진 욕조 앞에 이령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선선한 기온이었음에도 물을 나르니 저절로 땀이 났다. 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령은 욕조 선반에 있는 향유를 하나 꺼내 향을 맡았다.

황궁이 아니니 그녀가 이곳에서 씻을 때 하던 방법대로 향유를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