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황태자와 맞추었던 입술과 입술이 떨어졌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손은 갈 곳을 찾지 못했다. 결국 간신히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았다.

“황태자님….”

“영애, 이게 무슨 짓인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이 힘없이 바닥으로 낙하해 쨍그랑, 소리를 내면서 유리잔은 조각을 내면서 깨졌다. 그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나에게로 쏠렸다. 끌린 이목 안에는 당황한 표정으로 다급하게 나를 향해 뛰어오는 소꿉친구 도련님의 모습도 있는 것 같았지, 아마.

“멜리사!”

달려오며 나를 부르는 말에 대답할 힘도 없었다. 미끄러지듯이 난간에 손이 쓸리면서 몸이 흘러내려 주저앉아 버렸다. 난간 밖을 바라보니 바깥에 많은 기사와 용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중에 빨간 머리를 해서 눈에 띄는 용병이 하나 있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자 소꿉친구가 와서 나를 일으켰다.

“왜 그래? 괜찮은 거야?”

“속이 울렁거려. 안 괜찮은 것 같아.”

간신히 나온 말은 결국 약한 소리를 해버렸다. 마치 회식에서 과음했을 때랑 똑같은 기분이다. 그런 거 있잖아, 내일 무조건 숙취로 죽을 것 같다 싶은 어지러움.

가끔 티브이에 나오는 의사들이 하는 말이 있었지. 술은 독이랑 똑같은 거라고. 거짓말쟁이들이다. 독을 마시는 건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워.

‘위가 불타는 것 같아….’

지금 이렇게 독을 마셔 보니 술 같은 거랑은 느낌이 다르다. 소란스러워지자 친분이 적은 사람들까지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나의 호위 용병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소꿉친구의 손에서 호위 용병의 품으로 옮겨졌다. 나를 세차게 흔드는 손길에 어지러움이 더해지지만 그만하라고 말할 기운은 없었다. 세 명의 남자에게 둘러싸인 그대로 나는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정신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 * *

“아… 힘들다, 진짜.”

지금 시간은 새벽 3시.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으며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이 시간에 퇴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열흘은 된 것 같다.

“망할 회사. 택시비도 안 주면서 이렇게 자주 야근을 시키는 게 말이 돼?”

집이랑 회사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인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목 끝까지 채우고 있는 셔츠의 단추가 목을 조여 오는 기분이 들어서 잠긴 단추를 풀고 셔츠 목을 펄럭였다. 갑작스럽게 머리가 어질한 것이 졸음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어라…?”

위화감에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코를 훔치니 코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에는 코피가 범벅이 되어 있고 주변에는 차의 경적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번쩍거리는 도시의 빛과 소음들이 세상에 내가 혼자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구두를 신은 발이 아팠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느린 발걸음으로 전봇대가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머리 아파…. 왜 이러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빙글빙글 도는 머리에 전봇대를 붙잡고 쪼그려 앉았다.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상태지만 그 누구에게도 연락할 사람이 없네.

에휴, 민소리. 20대 후반이 되도록 부모도 없이 바쁘게 살아오느라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든가 주변에 남아 있는 그런 모든 게 없었네.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세상은 마치 현대 미술처럼 보였다. 졸음이 몰려온다. 11월은 추위가 벌써 찾아와서 이런 곳에서 자면 입 돌아가는데….

“춥다…. 그런데 졸려….”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골목 구석에서 외롭게 잠이 들었다. 심한 두통에 눈을 뜨기가 어려웠는데 갑작스럽게 얼굴을 스치던 차가운 바람이 따스한 바람으로 바뀌었다. 그 변화에 위화감을 느껴서 한쪽 눈을 살짝 떠보았다.

“…응?”

“아가씨도 참, 잠깐 조셨나 봐요. 안 그래도 오늘 날씨가 좋죠?”

“무슨…?”

“미인은 잠꾸러기라던데, 얼마나 더 예뻐지시려구요.”

부드럽게 웃으면서 내 등 뒤에서 머리카락을 빗질해 주는 이 여성은…. 누구지? 내 평생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은 없었다. 이건… 꿈인가. 아니면 사후 세계 뭐 이런 걸까?

“응? 아가씨, 왜 아무 말이 없으세요?”

내가 조용히 있자 여성은 이상함을 느끼고 말을 걸어왔다.

“아, 아아. 좀 피곤해서.”

나의 말투와 분위기는 어색했지만 내 등 뒤의 그녀는 그저 콧노래를 흥얼거릴 뿐이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은 새하얀 나의 손과 백금색 드레스, 홍차가 들어 있는 찻잔과 고급스러운 테이블. 넓은 정원과 색색의 꽃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정말로 여기는… 어디지?

“있지…. 너 말이야.”

“이왕이면 아가씨 제인이라고 불러 주세요! 저도 이제 저택에 온 지 제법 됐는걸요.”

“아하하, 미안해. 앞으로는 꼭 제인이라고 부를게.”

“네, 아가씨!”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내려면 제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를 것 같다. 어떤 정보를 알아내면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아가씨, 아가씨. 오후에 매튜 도련님께서 오시면 어떤 차를 내올까요?”

“매튜?”

“네! 매튜 도련님이요. 옆 동네 아르고 공작님의 아드님이신 아가씨의 소꿉친구분이잖아요.”

나는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마음에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순간 매튜라는 이름을 듣자 무언가 생각이 날락 말락 하고 있었다. 매튜라는 이름을 계속해서 입에서 굴리고 있자 불현듯 ‘매튜 아르고’라는 이름이 스쳤다.

“매튜 아르고….”

“네! 아르고 가문의 하나뿐인 장손, 매튜 도련님이잖아요!”

제인의 긍정으로 인해 확실해졌다. 여기는 내가 고등학생 때 도서관에서 스쳐 가듯이 읽었던 로맨스 소설 속이다. 고등학생 때야말로 공부 빼고 다 재밌는 시절이 아닌가.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었는데 이 소설은 1권만 읽고 2권은 안 읽었던 기억이 난다. 끝까지 읽을 걸 하필이면….

그냥 이류 로맨스 소설이었다. 소설의 제목은 [사랑하는 영애를 위하여]. 지금은 내용이 드문드문 기억이 난다. 아마도 내가 빙의된 캐릭터는 주인공인 멜리사 린델이다.

멜리사는 전형적인 아가씨로 얌전하고 차분하며 순종적이다. 주어진 상황을 거부하지 않고 따른다. 어떻게 보면 민소리와 다를 게 없다. 나도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만 일하면서 결국에 과로사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소설의 멜리사 그대로라면 외모도, 재력도 갖고 있으니 이번 생은 편하게 한 번 살아 볼 거야.

그래, 요즘은 그게 대세라며? 나는 나쁜 여자로 살아 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은 원작의 내용을 기억해내지 않으면 안 되겠지.

“있지, 제인. 내일은 내 일정이 어떻게 돼?”

“음, 내일쯤 마가렛 아가씨를 만나러 황태자께서 오신다고 하셨어요. 자리에 동석하시기로 하셨으니, 같이 티타임을 가지시겠죠?”

방금의 대화로 기억난 사실이 있다. 황태자와 마가렛 언니, 둘은 약혼 관계이며 아직 세간에는 발표하지 않았고 1년 후에 발표할 예정이라는 사실. 내가 읽었던 부분에서는 약혼을 발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모른다.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은 분명히 매튜였다. 매튜와 이어질 것 같은 분위기를 계속 보여줬고, 멜리사도 마음이 있는 듯한 묘사가 이어졌으니까.

‘그치만 주어진 인생만 사는 건, 이제 지루해.’

하지만 매튜와 우호적인 관계를 쌓을 필요는 있다. 매튜는 이야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고 아르고 가문은 계속해서 스토리 진행에 영향을 미치니까.

매튜와 우호 관계를 쌓으려면 일단 주인공인 멜리사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아야 한다.

‘우선 내가 기억하는 멜리사는….’

멜리사는 분홍색 머리카락에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린델 공작 집안의 영애다. 사용인들과 티타임을 즐기며 글쓰기를 좋아하는 그런 얌전한 아가씨. 그렇지만 나는 그런 얌전한 아가씨랑은 거리가 멀다.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서서히 스며들듯이 바뀌어야 한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 세계에서 오직 나만이 내 편이다.

찻잔 안 홍차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홍차 안에 비친 나의 모습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아직 ‘나’라고 믿기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받아들여야겠지.

“아가씨, 괜찮으시면 라벤더 차를 내올게요. 조금 더 있으면 매튜 도련님이 오실 시간이에요!”

“아, 그래. 아무 차나 괜찮아.”

“그럼 제가 따로 말해 둘 테니 방에 가서 옷도 갈아입고, 머리도 손질해요!”

그렇게까지 해야 해…? 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기 직전에 멈추었다. 지금은 무슨 수를 쓰든 매튜에게 잘 보여서 호감을 쌓는 것이 중요하니까 노력해야 한다. 왜냐면 아직 내가 해야 하는 일의 방향이 확실하지 않은 이상 가장 먼저 취해야 할 행동은 우호 관계 유지이기 때문이다.

“아가씨, 얼른 들어가요!”

“그래, 그래.”

나는 제인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을 지나 고풍스러운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택 안의 모습은 정말 소설 속에 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사실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신기했지만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사용인들은 나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인사를 건넸고 그런 대우들에 담담한 척을 하면서 제인이 안내하는 내 방까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