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님과 오묘한 위장 연애 1
서단우 지음
1. 공작님과 검은 고양이
방에서는 겨울의 숲을 닮은 향이 났다. 아니, 어쩌면 이 방의 주인 되는 사내의 품에서.
마녀 비올레타 팬텀우드는 숨을 죽인 채 눈알만 데구루루 굴려 주변을 훑었다. 문은 굳게 잠겼고, 그렇다고 창가로 내달릴 수도 없었다. 사내가 거대한 성벽처럼 그녀를 막고 선 탓이다.
‘방도 넓은데, 꼭 이렇게 바짝 붙어야 하나?’
비올레타가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그때, 사내가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말을 꺼냈다.
“도망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입매가 깊은 입술에서 차가운 저음이 흘러나왔다. 비올레타는 고개를 꺾어 사내를 제대로 올려다보았다. 그는 미동도 없었다. 둥근 은테 안경 너머의 회색 눈동자는 사냥감을 앞에 둔 늑대의 그것과 같았다.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비올레타가 보란 듯이 손을 내밀어 보였다. 사내의 것밖에 없는 이 공간에 발을 들이기로 한 순간부터 ‘합의되지 않은 탈출’이라는 선택지는 지웠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물리적인 힘이 부족하다면 마력을 쓰면 되는 것을, 몇 분을 대치하면서도 이 손에서 마법 반응 한 번 일어나지 않은 것이 그 증거였다.
“카옐 프로스트 공작이라고 하셨죠? 얌전히 있을 테니까 한 발짝만 떨어져 주시면 안 될까요?”
“수작 부리지 마. 당신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비올레타가 거리를 벌려 보려 꼼지락대자, 사내가 팔에 힘을 더 강하게 주었다. 철벽같은 가슴팍이 더 저를 압박해 오기 전에 그녀는 퍼뜩 움직임을 멈췄다.
“그럼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시든가요. 오라고 해서 왔고, 도망치지 말래서 고분고분하게 있는데.”
“그래, 본론.”
카옐 프로스트가 길고 다부진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촘촘하고 새카만 눈썹이 아주 깊은 골을 그리고 있었다. 카옐은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하듯 깊은 호흡을 뿜어내곤, 하나둘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어내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잘 봐, 당신이 낸 자국을.”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이 날아왔다. 그는 비올레타가 놀랄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단추를 네 개까지 거침없이 푼 뒤, 왼쪽 옷자락을 홱 젖혔다. 비올레타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똑바로 봐야지. 아니면, 내 도움이 필요한가?”
“아, 아니요!”
뭘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제게 유리한 방향은 죽어도 아닐 것이다. 결국, 비올레타는 합법적으로 카옐의 맨가슴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카옐이 말한 ‘자국’의 정체를 제대로 확인한 순간, 고양이 같던 비올레타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빗장뼈 아래에 선명한 보랏빛 인이 새겨져 있었다. 마녀마다 각기 다른 모양과 색을 지니는 ‘저주의 표식’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러네요?”
비올레타가 발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카옐의 입꼬리가 불쾌하게 꿈틀거렸다.
“끝까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굴 셈인가.”
카옐이 실소를 내뱉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맹수와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비올레타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시도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뒤편에는 반 발짝 뻗을 만한 공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등줄기가 차가운 벽에 찰싹 닿았다.
땅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솟을 수도 없으니, 남은 방법은 딱 하나였다. 카옐 프로스트가 자진해서 놓아주게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영양가 없는 논쟁을 다시 반복해야 했다.
“믿기 힘드신 건 알지만, 저는 정말 몰라요!”
“포기를 모르는군. 그럼 알게 될 때까지 이러고 있도록 하지.”
“아니, 이러고 있든 저러고 있든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니까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이쯤 했으면 그냥 차근차근 얘기 좀 해 주시는 게 어떨까요. 이걸 정말 제가 남겼다는 거예요? 뭐라도 제대로 알아야…….”
“그래, 당신 때문이라고! 당신 때문에, 나는 밤마다……!”
카옐이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 입술을 꽉 물고 비올레타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귓가가 시뻘겠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진심으로 억울했다. 정말 기억나지 않았다. 두어 달쯤 전, ‘이 몸’으로 눈을 뜨기 전까지의 모든 일은 지금의 비올레타에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 * *
눈이 몹시 많이 내린 연초였다. ‘올해야말로 마이너스 통장 탈출, 학자금 대출 완납’이라는 의지 하나로 살인적인 초과근무를 마치고 귀가하던 길. 어둠 속에서 새하얀 빛이 확 번졌다. 시야가 빛에 순응하기도 전에 높은 차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끼이이익.
찢어지는 소리가 도로를 울렸다. 급제동하던 차는 얼어붙은 도로를 속절없이 미끄러져, 그대로 그녀를 덮쳤다. 거대한 쇳덩이에 들이받힌 그녀의 몸이 붕 뜨더니, 아스팔트에 곤두박질쳤다. 뒤통수가 뜨겁고 눈앞이 번쩍했다.
‘어…….’
가물거리는 시야에 점멸하는 녹색 보행 신호등 불빛이 보이고,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꺼풀 아래로 필름이 흘렀다. 가장 가까운 과거에서부터 먼 과거로. 어딜 가나 배경은 허름한 회색빛이었고, 등장인물은 극히 적었다. 대사의 태반이 돈 걱정이었다. 등록금, 월세, 보증금, 대출 이자, 생활비……. 통장을 거쳐 갈 뿐인 돈의 지칭어들이 뒤섞여 들려왔다.
정신없이 살 때는 몰랐는데,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보니 지독하게 재미가 없고 텁텁했다.
‘병원비…… 나오겠지? 회사 못 가면, 생활비는…….’
길바닥에 드러누운 순간까지도 그녀는 제 역할에 맞는 대사를 내뱉기에 바빴다. 더듬더듬 돈 걱정을 이어 가던 그때,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어? 그런데 왜 안 아프지?’
분명히 아파야 하는데, 감각이 사그라졌다. 뼈가 조각나는 뜨거운 통증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짙던 피 냄새도, 귓가에 울리던 비명과 다른 도로 위의 경적도 모두 사라졌다. 그제야 그녀는 방금 눈앞을 스친 영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나 죽는 거구나.’
머릿속을 꽉 채우던 고민이 모두 날아갔다. 그저 허무했다. 돈도, 사람도 갖지 못해 굶주리기만 했던 나날 속, 그저 두 가지 소원만 품었을 뿐인데 과욕을 부린다며 벌을 주는 걸까. 하늘은 너무도 잔인했다.
‘돈도 못 모아 봤는데…….’
마지막 의식을 쥐어짜서 한다는 생각이 고작 그런 것이었다. 이윽고 기를 쓰고 펌프질을 하던 심장이 제 임무를 포기했고, 암전을 거듭하던 시야가 완전히 꺼메졌다.
-젊어서 죽었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는 누군가의 사망 선고와 함께 의식을 차렸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몸’이 마치 대기가 된 기분이었다.
‘여긴 어디지?’
의문 속에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천장도 바닥도 벽도 없는 어둠, 그리고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낯선 여자.
-왜 하필 이런 맹해 보이는 자야? 내 몸에 깃든 게.
여자는 한국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길고 풍성한 은발,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 눈매가 살짝 올라간 차가운 인상, 아래가 비칠 것처럼 하얗고 투명한 피부까지. 신경질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한번 보면 절대 까먹을 수 없는 외모였다.
여자는 계속 생소한 외국어를 쓰고 있었는데, 왜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목소리가 안 나와.’
언어가 통하는 김에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무리 힘을 써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는 법조차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리 애처롭게 퍼덕대는 그녀를 보고도, 은발 여자는 연민의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순 자기 할 말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지지리도 운이 나빴지만, 당신은 천운이었어. 위대한 마녀로 거듭나는 걸 축복으로 여기도록 해.
‘무슨 헛소리지? 이미 뒈졌는데, 누굴 놀리나?’
아마도 몸이 느껴졌다면 미간을 한껏 찌푸렸을 것이다.
마녀가 웬 말인가, 마녀가. 저승에 발 담갔다가 온 기념으로 특별한 능력이라도 생기는 걸까. 그녀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던 그때, 은발 여자의 몸 이곳저곳이 마치 가루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사그라지는 제 몸을 보며 ‘젠장’ 하고 낮게 내뱉었다.
-당신이 언제쯤 그 몸에서 깨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만 지시할게. 위대한 마녀 비올레타 팬텀우드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고, 처신 제대로 해. 그리고 날 이렇게 만든 것들을 반드시 찾아내, 사지를…….
여자는 위기의식 때문인지 빠르게 말을 쏟아 내었지만, 결국 마지막 말을 내뱉기 전에 반짝이는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언제 누가 있었느냐는 듯, 고운 빛의 입자밖에 남지 않았다.
‘아니, 이상한 얘기만…… 윽.’
기분 나쁜 현기증이 일었다. 시야가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짧은 간격으로 암전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차에 치여 죽었을 때와 달리 고통은 없었다. 따지자면 아주 무거운 잠기운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마치 무의식의 저 아래로 누군가 발을 잡아끄는 듯했다.
‘그래서 비올레타 팬텀우드가 누군데? 나는…….’
본래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비올레타 팬텀우드, 외국인치고도 특이한 이름만이 혀끝에 맴돌 뿐이었다.
곧 그나마 남아 있던 의식조차 희미해지고, 완전한 암전이 찾아왔다.
그렇게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낯선 풍경 속에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몸이 생생히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가만히 드러누운 채, 마치 혼수상태에서 갓 깨어난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손마디를 하나씩 까딱여 보았다. 힘이 하나도 없어서 손가락이 철근처럼 무거웠지만, 적어도 제 의지로 미동은 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당장 보이는 것은 높고 둥근 천장과 으스스한 모양의 금빛 샹들리에였다. 마른 나뭇가지가 불규칙하게 뻗어 나간 모양으로, 끝에는 초나 전구가 아닌 노르스름한 빛을 내는 수정구가 달려 있었다. 꼭 눈알이 열리는 나무 같기도 했다.
암만 보아도 병원은 아닌 듯했다. 환자의 정서적 안정을 추구해야 하는 병실이 이렇게 으리으리하고 으스스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저승인가? 상상이랑 너무 다른데.’
뻑뻑한 눈만 끔뻑이고 있으려니, 갑자기 웬 소녀가 옆쪽에서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곱슬기가 도는 붉은 머리카락에 뺨에 옅은 주근깨가 있는 소녀였다.
1초 정도 눈이 마주쳤을까, 소녀의 둥그런 눈이 더욱 커졌다. 노란 눈동자가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형형한 빛을 띠었다.
“어? 와아!”
활짝 벌어진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소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근깨가 진 뺨이 한껏 동그랗게 밀려 올라가는 것이 귀여웠다.
“비올레타 님께서 깨어나셨다!”
소녀는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며 어디론가 냅다 뛰어나가 버렸다.
“아, 아니, 난 비올레타가…… 흣?!”
목이 찢어질 듯 심한 갈증과 함께 낯선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언어 역시 한국어가 아니었다. 익숙한 영어도 아니고, 유럽 쪽의 언어와 비슷하냐고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딱 하나 분명한 것은, 꿈에서 본 그 여자가 쓰는 말과 거의 흡사하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충격에 입을 합 다물자 목소리도 뚝 그쳤다. 그녀는 비쩍 마른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다시 목소리를 내 보았다.
“아, 아.”
또 그 목소리였다. 그녀는 부스럭거리며 이불에서 손을 빼내어 제 눈앞에 가져갔다. 팔은 본래 자신의 것보다 가늘었으며, 손가락 역시 길고 가늘었다. 피부는 백지장처럼 하얬다.
‘위대한 마녀로 거듭나는 걸 축복으로 여기도록 해.’
꿈속 여자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한참을 바르작거린 끝에 겨우 몸을 일으키곤, 척추에 최악일 것 같은 자세로 기대어 앉아 두리번거렸다.
방은 어두운 편이었다. 벽지는 보랏빛에 가구는 진한 나무색으로, 온통 침침했다. 유일하게 하얀 것은 왼편의 큰 창에 드리워진 커튼이었다. 그 덕에 햇빛이 담뿍 들어와 밤낮은 구분되었다. 침대 옆에는 당장 입을 옷만 넣는 용도로 보이는 작은 옷장과 화장대가 있었고, 창가에는 전신 거울이 있었다.
‘설마.’
그녀는 벽을 짚고서 비틀비틀 그리로 걸어갔다.
그렇게 거울 속 자신과 마주한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푹 주저앉고 말았다. 꿈에서 본 은발 여자가, 그것도 꿈에서보다 더 수척한 모습으로 거기 있었다.
“뭐, 뭐야? 이거, 거울이 아닌가?”
말을 하니 맞은편 여자의 입술도 움직였다. 그러니, 이것이 환상을 비추는 요사스러운 도구가 아닌 이상은 거울이 맞을 것이다.
“꿈인가? 나 살아 있나?”
혹시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해, 병원 침대 위에서 깊은 꿈이라도 꾸는 걸까. 그녀는 자신의 뺨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하지만 만지면 만지는 대로 마른 손의 감촉과 체온이 느껴졌다. 말을 할 때마다 목에서 느껴지는 따끔함 역시 그대로였다.
“이게 뭐야? 나, 왜…….”
정말로 죽은 걸까. 죽어서 저세상이 아닌 ‘저쪽 세상’으로 와 버린 걸까.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그 비올레타 팬텀우드가 된 것일까. 도대체 왜.
멍하니 거울만 들여다보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여전히 다급한 소녀의 발소리에 웬 구두 굽 소리가 더해졌다.
-다샤, 그렇게 뛰면 안 됩니다. 비올레타 님은 안정을 취하셔야 하니까요.
동굴 같은 저음이 문밖에서 들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꽤 들뜬 말투였다.
‘성? 여기, 성이야? 비올레타 팬텀우드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발소리는 방문 앞에서 멈췄다. 졸지에 비올레타 팬텀우드가 되어 버린 그녀는 그리로 고개를 홱 돌렸다. 작게 현기증이 일었다.
문은 소녀가 열어 둔 그대로였으며, 이름이 ‘다샤’로 추정되는 소녀 옆에는 흑백사진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장발 사내가 서 있었다. 찻잔과 찻주전자가 놓인 쟁반을 한 손으로 받친 채였다.
“비올레타 님!”
뛰지 말라고 소녀를 다그칠 땐 언제고, 흑백의 남자는 거울 앞에 나자빠진 비올레타를 발견하자마자 다급히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쟁반을 침대 옆 협탁에 둔 뒤, 그녀 쪽으로 한달음에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뿔……?”
비올레타는 아연히 사내를 훑었다. 그는 얼굴선이 고왔고, 관자놀이 뒤쪽으로 굵고 곡선이 진 뿔이 솟아 있었다. 절대 인간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비올레타 님,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1년 동안이나 잠들어 계셨습니다.”
“왜 흑백이세요?”
“예?”
사내는 질문의 수준에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위대한 마녀가 어쩌고저쩌고에 이어, 이번에는 뿔 달린 흑백의 사내라니. 동화 속에서나 보았던 이상한 나라에 갇힌 것 같았다. 절대로 인간은 아닌 듯한 이자의 정체를 알아야만 했다.
“그쪽, 여기서 혼자만 흑백이잖아요. 애초에 뿔……도 이상하긴 한데.”
그녀가 재차 묻자, 사내의 새까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투도 묘하게 공손해지신 데다가 그런 질문을 하시다니, 놀랍도록 낯설군요. 정말 그 몸에는 다른 영혼이 들어앉은 건가…….”
“어? 마, 맞아요! 눈을 떠 보니까 이렇게 돼 있었어요!”
“그렇습니까…….”
사내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을 잃은 듯한 반응으로 보아, 아마 몸의 원래 주인은 싸가지가 없을지언정 그에게는 소중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저……. 혹시 되돌릴 방법이 있을까요?”
“없을 겁니다. 아니, 없습니다. 당신이 이 몸에 들어왔다는 건, 두 사람 다 이미 본래 속한 세상에서는 사라졌다는 뜻일 테니까요.”
“사라져요? 그럼 다시 못 바꿔요?”
“예. 이 몸에서 나가 봤자 당신의 영혼은 소멸하고 말 겁니다.”
무채색의 사내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 금방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나 결코 표정이 편안해 보이지 않는 것이, 평정보다는 체념에 훨씬 더 가까운 듯했다.
“소멸이라면, 죽는다는 거 아니에요?”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아, 그건 좀…….”
그녀는 심장이 멎던 순간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연속으로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저보다 먼저 ‘소멸’을 맞이한 본래의 비올레타 팬텀우드는 또 어땠는가. 그녀는 사방으로 흩날리던 은빛 가루를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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