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시작은 결혼부터 1
지은이 : 무소
펴낸곳 : 디키 웹소설(교보문고)
ⓒ 무소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교보문고와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으셔야 합니다.
All rights reserved.
복수의 시작은 결혼부터
1
무소
“황태자 전하, 레이디 엘리노어가 찾아왔습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레나투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내내 쥐죽은 듯 있던 여자가 결혼식 전날 밤에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혹시 코시모 황자님의 궁전과 착각한 게 아닌가 싶어 물어 봤는데…….”
“이유는?”
레나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질문했다. 시종 알버가 고개를 저었다. 어찌되었든 흥미로운 일이었다.
내일이면 자신의 이복동생인 코시모의 아내가 될 여자가, 이 늦은 시각에 자신을 찾아온 까닭이 무엇일까.
응접실로 가자 자신을 등진 채 꼿꼿이 앉아 있는 긴 금발의 여성이 보였다. 여체가 인기척을 감지했는지 뒤를 돌았다.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와 단번에 시선이 마주쳤다.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에 반해 행색은 몹시 고생하다 온 사람처럼 꾀죄죄했다.
드레스 자락엔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먼지와 땀으로 젖어 헝클어져 있었다. 꼭 몰래 탈옥이라도 한 사람 같았다.
그럼에도 여자가 가진 특유의 고상하고 우아한 분위기는 가려지지 않았다. 마치 진흙 속에서 피어오른 한 송이 고고한 연꽃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레나투스가 흥미로운 눈으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다급한 사안인지라.”
엘리노어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리구슬이 은쟁반을 구르는 것 같은 청아한 목소리는 여자의 말간 얼굴과 몹시 잘 어울렸다.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용서하세요.”
“글쎄요. 그보다 새 신부가 이 야밤에 외간 남자를 만나러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레나투스가 엘리노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곤란해지는 건 영애일 겁니다. 질 낮은 오해를 살 텐데.”
그 말에 엘리노어는 잠시 침묵했다 입을 열었다.
“오해를 사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제법 발칙한 대답에 레나투스의 입가에 헛웃음이 맺혔다. 농담이라기엔 과한데, 엘리노어의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황태자 전하, 이 말이 급작스럽게 들리실 것을 압니다만.”
엘리노어가 돌연 레나투스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동시에 연약해 보이던 여자의 기세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를 장작 삼은 듯한 불꽃같은 눈빛이 튀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
엘리노어는 결연한 눈빛을 유지하며 방금 그 말이 진심임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안다. 미친년이라고 생각하겠지. 동생과 결혼하기 하루 전에 형에게 청혼하는 여자라.
하지만 어쩌나. 미친 것들을 상대하려면.
“제 남편이 되어 주세요.”
이쪽도 똑같이 미친년이 돼야 하지 않겠어.
***
“너도 이제 결혼을 할 나이가 되었구나.”
두 달 전, 갓 스물을 넘긴 엘리노어에게 아버지 크라인 후작이 말했다.
성인이 되자마자 팔리듯 결혼한대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제게 큰 애정이 없었으니까.
“염두에 두신 상대가 있는 모양이에요.”
각오했던 일인 만큼 엘리노어는 거의 체념한 심정으로 말했다. 순순한 태도에 크라인 후작의 표정이 만족스럽게 변했다.
“코시모 황자님이다. 너보다 고작 한 살 많으시니 대화도 잘 통할 거다.”
“……황자비가 된다고요?”
잘해 봐야 후작 부인 정도를 생각했던 엘리노어로서는 예상치 못한 상대였다.
“황후께서 널 좋게 보신 모양이야. 가문의 영광이지.”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철칙 탓에 사교계 활동이 활발하진 않았다. 그게 높은 점수를 받은 걸까.
“찾아뵐 예정이니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있거라.”
며칠 뒤, 엘리노어는 새신부처럼 새하얀 오간자 드레스를 입고 메스트레 황궁으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녀의 아버지 또한 남색 제복을 멀쑥하게 빼어 입은 차림이었는데, 4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고 잘생기게 보였다.
가히 후작가의 외동딸을 유혹해 작위를 거머쥔 것이 이해되는 외모였다.
“단정하게 잘 입었구나.”
마차 안에서 크라인 후작이 엘리노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끝에 일언했다.
“황후 폐하와 코시모 황자님께 예의 바르게 보여야 한다. 알았느냐?”
“염려 마세요.”
짧지만 확실한 대답 덕에 크라인 후작이 더 잔소리를 하는 법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메스트레 황궁 안에 들어섰고, 엘리노어는 연한 분홍빛 외관에 눈부신 금장을 두른 화려한 궁전과 마주했다. 황후궁이었다.
“어서 오세요, 크라인 후작님. 두 분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차에서 내리자 황후궁의 시녀가 엘리노어 부녀를 아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두 사람은 그녀를 따라 황후궁 안에 들어섰다.
외관만큼이나 궁전의 내부 또한 화려했는데, 벽마다 빈틈없이 걸린 아름다운 유화나 섬세한 조각을 보느라 엘리노어는 잠시 긴장을 잊었다.
응접실로 들어서자 이미 황후와 황자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왕관 위로 우아하게 틀어 올린 줄리아 황후가 이제 막 주름지기 시작한 녹색 눈을 접어 웃었다.
“어서 와요, 레이디 엘리노어. 오는 길이 힘들진 않았나요?”
“제국의 아름다운 달을 뵙습니다. 주신 은혜로 편안히 왔습니다.”
엘리노어는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가 들어 올리면서 줄리아 황후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코시모 황자의 얼굴을 보았다.
어미와 판박이라고 봐도 좋을 그는 선이 고운 미남이었고, 얼핏 봐도 이 상황을 권태롭게 여기는 것 같았다. 아버지 말대로 이 결혼은 황후의 뜻인 듯했다.
“어서 앉아요.”
하지만 어째서? 코시모 황자의 맞은편에 앉으며 엘리노어는 의심했다.
고작 뜸한 외부 활동으로 정하기에는 지엄한 황자비의 자리였다. 황후가 아들을 얼마나 끔찍이 여기던가.
그녀가 메스트레의 유일한 공녀도 아니고, 공국의 공주도 아닌데.
그렇다고 크라인이 황후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만큼 대단한 가문도 아니었다. 도무지 납득가지 않는 혼사였다.
“황후궁은 마음에 들던가요, 레이디 엘리노어?”
“네, 황후 폐하. 외관부터 아주 아름답던걸요.”
“이 궁전을 영애가 직접 쓰고 싶을 정도로요?”
갑작스레 튄 질문에 엘리노어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감히 어찌……. 황후의 궁전이 아닙니까.”
황후가 웃었다.
“그러니까요. 영애가 황후가 되면 이 궁전을 쓸 것 아니겠어요?”
……자신이 어떻게? 코시모 황자는 둘째이고, 황태자가 멀쩡히 있는데.
이해가 되지 않아 순간 멍해진 얼굴로 황후를 쳐다보았을 때였다.
“황후가 되고 싶지 않아요?”
……아. 비로소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흔한 이야기 아닌가. 첫째 부인이 낳은 의붓아들 대신 제 배로 낳은 친아들을 후계로 세우려는 것은.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정치 암투에 어째서 아버지가 발을 들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황제의 장자이자 황태자인 레나투스는 건강하고, 명석하고, 도덕적으로 황위 계승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의 친모가 불미스러운 일에 휩쓸려 폐후가 되었다 한들, 이미 친자 검사를 통해 정통성까지 입증 받지 않았나.
아무리 황후가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는다 해도 황위 계승에 손을 대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차라리 황태자 쪽에 줄을 대시지, 어째서?’
애바른 아버지가 내렸다기엔 지나치게 무모한 판단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아무리 이 상황에서 발을 빼고 싶어도 그럴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듣던 대로 신중하네요. 마음에 들어.”
침묵하는 엘리노어에게 황후가 흡족한 미소를 보냈다. 조금도 기껍지 않은 칭찬이었다.
***
그날 차담은 거의 줄리아 황후와 크라인 후작의 독대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은 언제, 어떻게 결혼식을 올릴 것인지 한참을 이야기한 끝에 결국 두 달 뒤 식을 치르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두 달은 빨라도 한참 빨랐으나 엘리노어의 조심스러운 의견은 대번에 묵살되었다.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거라. 난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가야겠다.”
엘리노어는 고개를 끄덕인 뒤 타고 온 마차에 몸을 실었다. 여전히 머릿속은 이 갑작스러운 결혼으로 심란했다.
만약 일이 틀어지면 꼼짝없이 황자와 함께 목이 잘릴 텐데……. 순간 흐르는 식은땀에 엘리노어가 손수건을 찾을 때였다.
“이런.”
놓고 왔나. 엘리노어는 미간을 좁힌 채 마부에게 다시 돌아가 달라 부탁했다.
도착해서는 이런 일로 황후궁 시녀를 부르기도 민망해, 그녀 홀로 응접실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아, 게스턴…….”
엘리노어는 멈칫하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분명 줄리아 황후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녀가 입에 담은 이름은…….
‘설마.’
엘리노어는 저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고 발소리를 죽인 채 응접실로 접근했다.
벽에 가려져 있던 실상이 점점 그 정체를 드러냈다. 낯익은 드레스 자락이 역시나 낯익은 남색 바지와 서로 얽혀 있었다.
“하, 줄리아. 여기서는…….”
“뭐 어때. 우리밖에 없잖아, 응?”
……아버지.
엘리노어는 튀어나올 듯 커진 눈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그로 인해 인기척이 생기자, 한창 서로를 더듬던 두 남녀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거기 누구지?”
크라인 후작이 허공에 대고 날카롭게 외쳤다. 엘리노어는 입을 꼭 틀어막은 채 신고 있던 구두를 벗었다.
위기 상황이라고 인지한 몸이 놀랐음에도 제때 움직여 주었다.
서둘러 기둥 뒤에 몸을 숨기는데, 크라인 후작이 응접실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폈다.
“분명 구두 소리가 들렸는데.”
“게스턴, 너무 예민한 것 아니야?”
뒤이어 여자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엘리노어는 여전히 입을 틀어막은 채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줄리아 황후를 쳐다보았다.
머리카락 한 올조차 흘러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올린 머리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엘리노어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누가 보고 눈치껏 자리를 비켜 준 거겠지.”
“하지만…….”
“알잖아. 다 내 사람들인 거.”
그 말을 뱉고 황후는 곧바로 크라인 후작에게 입을 맞추었다. 엘리노어는 눈빛이 흔들리면서도 그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똑똑히 보았다.
키스가 한참 동안 이어졌고, 그 시간 동안 엘리노어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평생 남편의 사랑 한 번 받지 못하다 결국은 병석에 앓아누운 어머니를.
“사랑해, 게스턴.”
“나도 그래, 줄리아.”
어릴 때조차 어머니에게 보여준 적 없던 다정한 모습에 엘리노어의 눈가가 잘게 경련했다.
두 사람은 잠깐 서로를 끌어안다 다시 응접실로 들어갔고, 그제야 엘리노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까 일의 여파 때문인지 홀로 남겨졌음에도 소리 하나 함부로 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