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신, 하 변호사 03권
죽음의 신, 하 변호사 03권
죽음의 신, 하 변호사
03
산경(山景)
죽음의 신, 하 변호사 03권
차례
Chapter 01.
Chapter 02.
Chapter 03.
Chapter 04.
Chapter 05.
죽음의 신, 하 변호사 03권
Chapter 01.
“내가 먼저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으라?”
“그렇습니다. 이사회를 열어서 사임 의사를 먼저 밝히십시오. 그리고 기술 총괄 부문 사장에게 대표이사 자리를 주십시오.”
신형철 사장은 너무 자신 있게 말하는 장 실장의 태도가 오히려 믿음직스러웠다.
“기술자에게 사장 자리 준다는 건 기술 개발에 전력을 다한다는 각오를 보여주는 효과를 노린 거지?”
“맞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은 유럽으로 가십시오. 유럽 시장 챙긴다는 명목이면 충분할 겁니다.”
신 사장이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미국으로 가서 이번 일을 해결하는 게 더 보기 좋은 모양새가 아닐까? 유럽으로 가는 건 사고 치고 도망치는 모습 같잖아?”
“사장님께서는 엔진 문제를 책임지신 겁니다. KI 모터스 사상 처음으로 기술자가 사장 자리에 앉았으니까요. 미국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죠.”
신형철의 눈이 커졌다.
“배형준? 그놈을 미국 문제를 책임지게 한다고?”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앞으로 벌어질 모든 소송의 시작은 바로 배형준 때문이니까요.”
무릎을 탁 칠만한 기발한 생각이다. 그놈과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현재의 위상을 잊고 있었다.
절반의 핏줄이라는 사실만 빼버리면 조직 관계만 남는다.
KI 모터스 대표이사는 KI 뉴욕 법인의 이사장이며 대주주다. 뉴욕법인장의 임명과 해임은 바로 KI 모터스 대표인 자신의 손에 있다. 당연히 업무 지시할 권한도 있다.
“역시, 우리 장 실장! 깔끔한 해결책이네.”
만족한 신 사장의 표정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이런 계략을 알려준 하 변호사가 고맙기까지 했다.
* * *
술상을 앞에 놓은 형제는 어색한 기운을 떨치려 하지 않았다. 이미 어색해진 사이고 앞으로는 원수가 될 사이다. 애써 불필요한 가면까지 쓸 만큼 숨겨야 할 감정도 없다.
“처음부터 그냥 아버지에게 매달리지 그랬어? 그랬다면 변방이 아닌 꽤 괜찮은 계열사라도 얻었을 텐데. 괜히 와신상담하는 척하다 겨우 배터리 공장 하나 받았잖아.”
“처음엔 그다지 욕심이 없었으니까요.”
“없던 욕심이 갑자기 생겼다?”
“겨우 배터리 공장 하나도 아까워하는 신 사장님 소갈머리를 보니까 내가 더 낫겠다 싶어서요.”
잔을 든 신형철이 피식 웃었다.
“우리 배 대표, 이제 앞뒤 없이 말하기로 작정했나 보네. 싸가지 없이.”
“사장님에게는 그래도 됩니다. 살인죄를 덮어씌워 제거하려던 사람에게 예의 차릴 만큼 제가 성인군자는 아닙니다.”
“그래도 내가 임명권자라는 건 알지? 딱 그 정도 예의만 있으면 돼.”
“끝까지 구질구질하군요. 끌어다 쓸 게 없으니 회사 정관까지 끌어옵니까?”
신형철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회사 업무를 그렇게 폄훼하면 쓰나? 법인 대표이사께서.”
신 사장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미리 보여주는 건데 한번 봐. 이 공문은 정식으로 미국 법인으로 보낼 거야. 지금쯤 이사회가 열려서 최종 결재 중일걸?”
배형준은 신 사장이 내미는 서류를 낚아챘다.
“이… 이런….”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의 배형준을 보며 신형철은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저런 얼굴을 보는 건 정말 통쾌한 일이다. 장 실장에게 두둑한 보너스를 줘야 할 것 같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은 미국 법인이 처리해야지. 기나긴 소송전이 이어질 테니까 잘 대처하라고. 이번 일은 수조 원의 손실을 얼만큼 줄이느냐가 관건이니까 꼭 소송에서 이기지 않아도 돼.”
배형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서류는 공적인 일이다. 형제끼리 집안싸움을 하더라도 공적인 일마저 팽개칠 수는 없다. 공적인 일을 팽개치는 순간 집안싸움을 할 수 있는 링에서도 내려와야 하는 기권패와 같다.
“아, 여기 한번 찾아가 봐. 널 구해준 하대수 변호사 말로는 실력 좋은 변호사들이 득실대는 뉴욕 로펌이라고 하더라고. 거…. 회사의 형편없는 변호사는 너무 믿지 말고.”
신형철은 하 변호사가 전해준 명함을 툭 던지며 일어섰다.
“밥값은 내가 내지. 그래도 형이니까.”
이를 악문 배형준은 시작부터 흠씬 두들겨 맞았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1라운드는 완전한 참패다.
* * *
“신형철 사장은 퇴임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사회 승인이 나는 대로 유럽으로 가겠다고 했답니다.”
유정재 비서는 조심스레 말하며 신 회장의 눈치를 살폈지만 별다른 표정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유럽? 거긴 뭐하러?”
“대외적으로는 유럽 시장 확대에 전념하겠다고 합니다만 이번 일에서 완전히 자취를 지우려는 생각일 겁니다.”
“소나기는 피한다?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푹 쉬다가 오겠다는 거 아냐?”
“그건 아닐 겁니다. 철부지도 아니고. 어차피 유럽 법인에서 다 지켜본다는 걸 아니까 마냥 놀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다시 눈치 살피는 유 비서를 보며 신 회장이 말했다.
“왜? 형준이 때문에?”
“네. 신형철 사장에게 완전히 당했습니다.”
“당했다고? 어떻게?”
“신 사장이 앞으로 벌어질 미국 소송을 뉴욕 법인에 맡겼습니다. 그러니까 배형준 대표가 이 소송을 책임져야 하는 겁니다.”
신 회장은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보였다.
“관례를 따져 봐도 전혀 억지가 없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간 KI 모터스의 미국 분쟁은 전부 뉴욕 법인이 전담했으니까요. 사소한 리콜 정도도 책임졌으니 이번 소송 역시 뉴욕 법인이 책임지라는 건 무리한 요구가 아니죠.”
“거 참….”
“절묘한 한 수였습니다. 각자 책임질 일을 책임지자는 것이니 배 대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 회장이 조용히 말했다.
“형철이가 유럽에 가더라도 놀지는 않겠구먼.”
“변했다는 걸 아시겠습니까?”
“그래. 철 들었네. 어른이 다됐어. 동생이랑 싸우는 게 아니라 싸움 상대가 아니라는 걸 일깨워줬으니….”
“그냥 두고 보시겠습니까?”
“왜? 도와달라고 연락 왔어?”
“배 대표가 회장님 일정 확인해 달라고 연락했습니다. 출국하기 전에 인사드리겠다고.”
신 회장은 손을 내저었다.
“처음부터 난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미 끝난 싸움이야. 물어뜯겠다고 덤비는 놈에게 뼈다귀 하나 입에 물리고 쫓아버렸으니 누가 관심이나 두겠어? 그룹 경영진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 거다. 제 손으로 엎은 밥상 다시 차리는 꼴을 재미있게 구경하자는 마음일걸? 바빠서 못 만난다고 해. 소송 잘 처리하기를 바란다는 게 내 마음이라고….”
유정재는 신 회장의 뜻은 이미 확고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배형준은 앞으로 그룹에 발을 딛기가 힘들 것이다. 그는 배터리 회사 하나 지키는데 전력을 다해야지 행여나 그룹 쪽으로 다시 눈을 돌리면 그 배터리 회사마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그때의 위협은 배다른 형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위협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관심은 자식이 아니라 다른 곳에 더 빠져 있다.
“성과는 좀 나와?”
유정재는 어떤 성과를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약간의 진전은 있습니다. 훈련 강도를 좀 올리니까 능력치 발전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방법이 먹히긴 하는구만.”
확실히 서양놈들은 독했다.
신 회장은 늘 여유를 가지고 지켜보는 수준이었지만 RC&D는 능력 향상을 위해 실험체의 목숨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훈련 시켰다.
“잠깐 방심하는 대가는 죽음! 이런 훈련이 아니면 인간 수준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죠. 야생의 벌레도 방심하면 먹이가 되는데.”
연구소의 실험체들은 제인 스미스의 한 마디 덕분에 오늘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 * *
“Vive le Roi!”
무릎을 살짝 굽히며 머리 숙인 올리비아 브라기를 보며 하 변호사는 큰 웃음을 터트렸다.
“아, 미안.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달라서 말이지. 아무튼 보기 좋아. 이런 굉장한 미녀였다는 건 나 비서가 말하지 않았거든.”
“겉모습이 미녀라고 해도 하데스님께서야 본질을 보실 테니 그 불협화음 때문에 웃음이 나실 겁니다. 하지만…. 두 번은 실례라는 거 아시죠?”
“물론. 브라기라는 존재 앞에서 그 누구도 같은 이유로 두 번 웃으면 안 되지. 또한 그 누구도 오딘의 아들이라는 헛소리를 해서도 안 되고.”
브라기는 웃음을 참으며 말하는 하 변호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결국 오딘의 이름을 꺼내시는군요. 뭐…. 좋아요. 아주 오랜만에 만났으니 오늘 하루는 무슨 말씀을 하셔도 참아드리죠.”
“아냐. 더 할만한 것도 없어.”
“그럼 이제 뉴욕에 오신 이유를 말씀해보시죠.”
“지난번에 뉴욕에 왔을 때 관련된 한국 대기업 알지?”
“네? 아…! KI 그룹?”
“그래. 여전히 그 일이야.”
하 변호사는 배형준의 살인 혐의 이후로 벌어졌던 일을 설명했고 지금은 엄청난 소송을 앞두고 있다는 것도 알려주자 브라기는 낮은 휘파람 소리를 냈다.
“대단한 가문이군요. 형제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
“그냥 유산 싸움이야. 짧은 생명이 만들어낸 문제지.”
“짧은 생명에 반해 너무나 많은 부를 축적한 게 문제죠. 그런 거 보면 인간은 참 경이롭기도 해요. 아무튼 그거랑 뉴욕에 오신 거랑 무슨 관련이 있길래?”
“내가 당신을 소개시켜 줬거든. 아마 그 동생이 찾아올지도 몰라. 이번 소송 맡기려고.”
브라기의 눈이 반짝였다.
“그거 반가운 소리네요. KI 그룹이라면 넘치는 돈을 주체못하는 기업이니까…. 수임료 몇억 달러 정도는 무조건 챙길 수 있는 건이잖아.”
벌써 인센티브를 계산하는 게 보였다.
“인간이 경이로운 게 아니라 당신도 경이로워. 이미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 거 같은데 아직도 돈이 부족해?”
브라기는 손을 내저었다.
“모르는 말씀 하지 마세요. 써버린 돈이 훨씬 많아서 늘 돈이 부족하다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캘리포니아 와이너리 사려고 알아보는 중인데 이 건만 잘되면 꽤 괜찮은 나파벨리 와이너리 하나 장만할 수 있겠어요.”
부를 축적하려는 노력은 같지만 그 목적은 다 다르다. 눈앞의 올리비아 브라기는 돈을 쓰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번다. 좀 허무한 느낌이 들어 피식 웃자 브라기가 말했다.
“그럼 하데스님은 왜 그리 부를 모으시는 거죠? 과거에는 부의 상징인 지하자원을 다 가졌다는 오해로 인간들이 부의 신이라고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잖아요?”
“내가 많은 부를 모으긴 했나?”
“절 뭘로 보고? 하데스님 미국 자산 목록…. 제가 관리하는 거 모르세요?”
이런 질문을 받으니 딱히 두드러진 이유가 없다. 그냥 인간 세상에 어울려 살다 보니 인간의 생활양식과 비슷하게 산 것뿐이다.
“글쎄. 어쩌면 가장 인간답게 행동하려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 같은데? 내가 부를 축적하는 것도 좀 더 인간다움을 갖추기 위한 것 같기도 하고. 부자라고 하면 정말 인간적이지 않아?”
브라기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정답이네. 신적인 존재는 부자가 될 필요가 없죠. 신은 사제를 부자로 만들어 주는 도구일 뿐이니까.”
* * *
“만나서 반갑습니다. Mr. BAE. 말씀 많이 들었어요.”
처음 보는 올리비아 브라기라는 변호사가 자신을 이렇게 반기니 어리둥절한 배형준이었다.
“아…. 지난 사건 때문에요. 리튬 채굴장 사건으로 제가 뉴욕 검찰청에 좀 알아봤죠. 그 사건을 맡았던 하 변호사님께서 우리 로펌에 몇 개 의뢰한 내용도 있고.”
“그랬군요.”
“이번에도 사건 내용은 개략적으로 들었습니다. 난처해지셨다고?”
배형준은 올리비아라는 변호사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 변호사님께서 어디까지 말씀하셨는지?”
브라기가 살짝 미소 지었다.
“형제들의 다툼이니 절대 지면 안 된다고 강조하셨죠. 혹시 이것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인 내용이 있을까요?”
소송에서 무조건 이긴다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건 없다.
“지면 안 된다는 말이 믿음직합니다.”
만족한 배형준의 표정을 확인한 브라기는 손뼉을 짝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