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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날
1
1장
또각. 또각.
어김없이 시곗바늘은 멈추지도 않고 움직이더니 알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피곤함을 무릎 쓰고 허우적거리는 손으로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는 자명종 시계 버튼을 누르자 방은 거짓말처럼 고요해지며 시간은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감은 눈은 좀처럼 뜰 생각이 없었다. 이불 속의 온기와 이불 밖의 냉기는 이질감이 돌았으니까.
지수가 몸을 일으키고 산발이 된 단발머리를 뒤로 수면 안대를 벗자 퉁퉁 부은 눈과 오뚝한 콧대를 한 콧방울이 냉기에 새빨갛게 바래있었다.
춥다…. 도대체 보일러는 언제 고쳐주는 거냐고.
지수가 빳빳한 고개를 돌려 주변을 힐끗 바라보는데 빈 맥주 캔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가 하면, 휴지 곽에서 한가득 뽑힌 돌돌 말린 휴짓조각들이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돼지우리가 따로 없었다. 이별의 연장선이다.
“이 미친년아! 술만 처먹으면 매번 지랄이냐 지랄은!”
지수가 산발이 된 머리를 잡아 뜯으며 몸부림쳤다.
때는 11월 1일.
운이 좋게도 가장 친한 회사 동료에게 소개팅을 주선 받아 과분한 남자와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올해는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수 있는 남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렘은 가득했고 만남은 지속적인 그런 사이를 자연스럽게 꿈꿀 수 있었다. 그를 만날 때면 자유분망한 몸은 요조숙녀처럼 조신함을 갖췄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남은 12월 막바지까지 이어지다 12월 25일에 쓰디쓴 이별을 맛보고 말았다.
‘지수야. 수동적인 사랑은!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
그가 내게 건넸던 마지막 말이었다.
수동적인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애정결핍과 비슷한 결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생각만큼이나 타인을 배려하는 습관에서 시작되는 오판이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좀처럼 그의 마지막 말에 답을 내진 못했다.
꽃샘추위만큼이나 몸이 움츠러들었다. 뼛속까지 바람이 스며드는 것도 아닌데 가슴으로 무릎을 곱게 모아 숙인 고개 위로 흐느낌을 느꼈고, 두 달 연애면 후유증도 2주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짧게 만났던 인연들은 대체로 2주를 넘겨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일까…. 좀처럼 이별이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이별에서 느끼는 아픔이라기보다 인연에서 오는 알 수 없는 아픔이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난 오늘도 그 답을 찾기 위해, 사랑을…. 아니, 어김없이 출근을 한다.
이별의 후유증으로 식욕이 사라진 바람에 자연스레 아침을 거른 게 다이어트가 되었다. 체중은 2주 만에 3kg가 빠져 핼쑥해진 몰골을 보며 짙게 화장을 해볼 법도 했지만, 회사에선 잘 보일 사람이라고는 눈뜨고 찾아보기 어려운 나머지 머리 감는 것도 잊어버릴 때가 많았다. 그래도 머리를 빗고, 헤어 파우더로 기름기를 제거하며, 헤어롤로 앞머리를 말아 올리는 등 최소한의 노력을 보였다.
“그래도…”
지수가 화장대에 앉아 뭉뚱그레 고민하자.
“화장은 무슨 화장이니….”
서울의 출근길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 엄청난 인파에 옥신각신 붙어 연애 때도 해보지 못한 세상 모든 남자의 품을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리저리 유랑하고 있었다. 지하철 도어가 열리고 지하철 안에서는 수많은 인파가 쏟아져나오는데 마치 재난영화를 방불케 했다.
기빨린다, 정말….
역에서 회사까지는 보도로 5분 안팎에 있었지만, 출근길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은 나머지 힘없이 회사 정문을 도는 회전문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했다.
역시 퇴근하는 게 맞겠지?…
“그거 아니야.”
지수가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젓는데, 긴 생머리의 소영이 나란히 회전문을 돌고 있었다. 정소영. 소영이는 지수와 고등학교 때 만나 자그마치 10년을 인연을 이어온 유일한 친구였다. 늘 밝았고, 명랑한 친구라서 항상 주변에 친구들이 끊이질 않았고, 부드러운 성격과 별개로 곰돌이 상에 티존이 짙은 외모 덕분에 남자가 마를 날이 없었다. 무엇보다 전 남자친구를 주선해준 장본인이었다.
“퉁퉁 부은 거 보니까, 어제도 울었구나.”
다 좋았지만, 소영이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바로 눈치가 없다는 것.
아침부터 거머리처럼 들러붙는 소영이를 떼어내느라 젖 먹던 힘까지 짜내야만 했다.
“제발 좀 떨어져 줄래?”
“왜에, 포근하구 좋잖아. 그리구 세상에 반이 남자라잖아? 그 말은 뭐야? 이렇게 눈이 퉁퉁 부어라 슬퍼할 겨를도 없다는 거지.”
맞아. 세상에 반이 남잔데, 이렇게 슬퍼할 겨를이 있는 거냐구.
지수는 매번 당하고도 이상하게 소영이의 말에 납득 되고는 했다. 그래도 지수는 소영이를 볼 때마다 행복했다. 인생에 인연은 가족 포함해서 셋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런데 부모님을 포함한 소영이까지 가져갈 인연은 모두 이룬 셈이나 다름 없었으니 말이다.
지수가 회심에 찬 눈으로 소영이를 빤히 바라봤다.
남자를 만나려면 누구부터 손절해야 하는 거지?
“왜 그렇게 바라봐?”
소영이 눈치 없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들어가자.”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소영이 게슴츠레 뜬 눈을 거두며 회문전을 지나는 지수를 따라 출근 도장을 찍었다.
***
회사는 아침부터 직원들로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웹디자이너 일한 지 3년 동안 처음 보는 광경에 얼떨떨한 기분을 좀처럼 감출 수 없었다.
“부, 불안하게 무슨 일이에요?”
지수가 책상에 널브러진 서류를 갈무리하며 서류를 냅다 집어 어디론가 움직이는 대진의 팔을 잡아 물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곧 사장님 온대.”
이상할 일이었다. 평소 사장님이 회사에 도착하는 것이 천지개벽할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개발자며, 웹디자이너며, 내향인들로 모인 이 회사에서 오히려 사장님의 출근 여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게 회사의 암묵적인 룰과 같았으니.
또깍. 또깍.
자명종 시곗바늘 소리와는 다른 구둣발 소리가 회사를 메웠고, 사장님과 나란히 선 한 남자가 정장을 갖춰 입은 중년 여럿을 줄줄이 달고 회사로 들어왔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 모두 시선이 집중되며 순간적으로 공기가 꽉 찬 듯한 느낌이었다
잠깐이었지만 지수는 날렵한 외모에서 비치는 창백한 얼굴빛을 가진 남자를 뚫어져라 보며 그가 회의실 안으로 자취를 감추기까지 잠시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잘생겼다. 그리고….
통유리로 마감된 사무실 내부는 허리춤에서 1미터 간격으로 블라인드가 되어 내부는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할 수 조차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사전에 고지도 없이 수행원까지 데리고 올 정도의 남자와 1시간이 넘도록 회의를 하는 것인지 지수의 의문은 도무지 풀릴 기미가 없었다.
주변을 살피자 동료들도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넌 무슨 일인지 알아?”
답답한 나머지 지수가 소영이에게 물었다.
밝고 명량했던 소영은 좀처럼 표정이 좋지 않았고 어설픈 눈동자만이 지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 뭐라고 했어?”
“저기 안에. 무슨 일인지 아냐구.”
“나, 나야 모르지?”
아침에 뭘 잘못 먹었나? 얘는 또 왜 이래?
마침 회의실에서 사장과 낯선 남자를 따라 수행비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장과 남자는 악수를 끝으로 회사를 나서는 그때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당혹스러운 나머지 눈만 빼꼼 내민 머리를 모니터 부스 안으로 숨기고 말았지만, 그가 찰나 짓던 미소는 놓치지 않았다.
웃어? 왜?
“근데 나 왜 숨는데?”
빳빳히 허리를 세워 일어서자 남자는 사라지고 회사는 비명으로 가득 찼다. 물론 비명은 긍정이었다.
무려, 그것도 자그마치, ‘One’ 대기업의 인수 건이었으니까.
본의 아니게 회전문을 돌며 고민했던 퇴근의 난제는 대기업의 인수 건으로 이루어지고 말았다. 이는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3년간 회사를 이어온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인수 건이라니….
지수가 어안이 벙벙해져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수에게는 징크스가 있었다. 남자만 만났다 하면 일이 풀리지 않았던 반면, 이별은 거짓말처럼 없던 복도 굴러 들어오고는 했다.
어안이 벙벙은 했지만, 할 말은 해야만 했다.
“야 김성윤! 오빠 진짜 이러기 있어요?”
김성윤이라는 말에 말끔히 정장을 차려입은 사장이 뒤를 돌았다. 이런 중차대한 문제에 단 한마디 언지도 없이 인수 건을 진행했다는 것에 지수는 체면을 구겨야만 했다.
3년 전 대학교를 졸업하고 동기들과 함께 스타트업으로 시작한 ‘Universal Waite’회사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팔던 회사에서 웹 기반 대화형 인공지능 ‘Romance’를 출시하며 연간 30억이라는 매출을 올리는 소기업으로 성장했다.
근데, 인수건이라니…. 두 눈으로 보고 들어도 믿기지 않았다.
성윤은 입꼬리가 귀에 걸릴 것처럼 희끗희끗 솟았고, 눈은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너 최근에 헤어진 일이라도 있었냐?”
성윤이 정곡을 찌르자 지수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동료들은 조롱 섞인 성윤의 말에 덩달아 호탕하게 웃기 바빴다.
“웃지 마라! 확 다 엎어버리기 전에.”
지수가 낼 수 있는 최대 카리스마는 여기까지였고 당연히 동료들에게 먹힐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었어. ‘One’에서 이 사실에 대해서 직원들에도 함구해달라고 요청했었거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내 체면이 뭐가 되냐고.”
지수의 목소리가 성윤의 귀에 철썩 닿았고, 그녀의 이가 꽉 물린 것이 보며 성윤이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서 하는 말인데 회식하러 갈까?”
성윤의 미안한 어조보다 회식 제안에 사무실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직원들이 떠난 후에도 그들의 기쁨이 가득 남아 있는 듯 피부가 얼얼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좋은 일이니까, 너도 얼른 기분 풀고 어서 가자.”
지수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회사를 빠져나왔다.
***
“위하여!”
직원들이 소주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하늘을 향해 치켜세웠다. 소줏잔에는 소주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기쁨과 그동안 쌓아온 소중한 추억들과 노력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즐거운 순간을 마주한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모처럼 술맛은 달콤하고 진하게 느껴지는 그때, 지수의 스마트폰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지수가 스마트폰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동료들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퇴근하기 글른 것 같은데요?”
거짓말처럼 언론에는 ‘One’이 ‘Universal Waite’를 인수한다는 보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회식하는 직원들의 스마트폰에도 언론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성윤이 어금니가 드러나도록 웃어 보였다.
“출근이면 어떻고, 퇴근이면 어떻니? 우리가 언제 또 이런 천운을 맛보겠어. 그러니까 다들 폰 내려놓고 일단 즐기자고.”
그의 말이 맞았다. 좀처럼 인생에서 일어나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지수는 한동안은 동료들의 행복을 지켜보기로 생각했다. 추운 날씨였지만 왠지 모르게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어 패딩을 여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를 받는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와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세먼지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은, 청량하고 복잡한 마음에 안정감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이별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아 지그시 눈을 감고 피부를 스치는 바람과 함께 날려보내려 했지만, 하늘은 그마저도 불허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으니까.
“오랜만이야.”
익숙한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에 맺힌 성에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다. 낯선 남자의 모습이 점차 또렷해지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이내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아침 회사에서 봤던 'One' 대표이사 장 원. 첫사랑이었다.
그를 만난 건 정확히 10년 전이었다.
2장
고등학생이었던 2014년에는 코딩이라는 새로운 먹거리 신(新)산업으로 등극할 때쯤, 너도나도 코딩을 공부하며 새로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에 몸을 싣곤 했다. 고등학생이었던 장원에게는 코딩의 세계는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지만, 반드시 돈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그가 제안을 건넸다. 처음에는 제안이 그리 큰 용기였을 줄 몰랐던 지수는 다른 남자들이 던지는 추파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땅히 꿈이 없었던 나머지 취미 삼아 코딩 학원을 등록했는데, 구석진 곳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장원을 보며 자신에게 했던 제안이 추파가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날이 거듭될수록 그는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키보드를 치는 내내 굉장히 산만한 모습을 보이는 반면, 공부에는 전혀 집중을 못 했다. 두 달 무렵에는 팀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수업에 집중을 못 하는 장원이 피해만 줄까봐 한 조가 되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불안한 예감은 어째 틀린 적이 없는지, 장원과 같은 조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는 남들과 다른 희한한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 게 되었다. 그가 굉장히 질문이 많은 아이였다는 것을. 다르게 말하면 호기심이 정말 많은 친구였다.
늘 조용한 친구였고, 그 탓에 따돌림도 많이 당했지만, 그가 무언가를 배우는 데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기에 그 모습만큼은 일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질문은 도가 지나칠 정도로 많아 수업이 끝나고 나면 진이 빠지는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다시금 혼자서 개발을 하는 모습을 보면, 원래의 장원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가까이 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갖곤 했다.
그러나 그 마음도 잠깐이었다. 그가 얼마나 건강한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사람들은 나를 멍청이라고 불러…. 그래서 노력하는 거야. 1년 뒤에도 똑같은 이유로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난 진짜 바보인 거니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고작 고등학생에 불과한 그에게는 남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할머니와 같이 사는 장원에게는 가난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고는 했다. 그는 가난이 주는 비참함을 원망하지 않았고, 처음에는 왜 원망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음에도 그의 마음속 깊이 들여다보는 건 실례라고 생각했기에 한발 물러섰다.
이유는 몰라도 가난은 가만히 있는 것조차 사치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봤었으니까.
또한 운동을 거르는 날도 없었다. 종종 편의점을 지날 때면, 금전 문제인지 헬스장이 아닌 공원에서 철봉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지나칠 때가 많았다. 철봉을 할 때면 철봉 횟수가 많은 것도, 하나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철봉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주로 보여주다 보니 하나같이 공원을 지나는 사람들은 우스꽝스러운 장원의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과 비난을 일삼았다.
사람들에게 장원은 비웃음거리에 불과했다. 그래서 나 역시 그를 부끄럽게만 여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좋든 싫든 남들의 시선을 끄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자신마저 그가 없는 날이면 마음이 공허해지고는 했으니까 말이다. 그저 산만한 모습을 보였을 뿐이었고, 바보 같은 행동만 일삼았던 그였을 뿐인데도 그의 빈자리는 나조차 바보가 되는 기분을 주었다. 고작 하루 학원에 나오지 않았을 뿐인데 학원의 공기가 무겁게만 느껴졌고, 그 공기에 몸이 짓눌린 것만 같아 앉아 있는 내내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이 감정은 점점 사랑으로 싹 트여갔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신경쓰인 나머지 하굣길에 배고픈 것을 이유 삼아 저녁을 먹자 제안했다. 특별히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그에게 무엇을 먹고 싶냐며 넌지시 물자 그가 “떡볶이.”라고 답했다. 순간 헛헛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로 배려 차원에 상대방에게 무엇을 먹고 싶은지 한 번은 되물어봐 주는 게 암묵적인 관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뭔가 다르긴 달라도 주관이 뚜렷한 아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덕분에 내가 결정장애를 고민할 일은 없겠다.”
말의 뜻을 이해했는지 그가 뭉뚱그레 눈을 뜨며 말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래도 눈치를 밥 말아 먹지는 않았네.
“나도 떡볶이 좋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무슨 뜻이지….
떡볶이를 먹는 내내 그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먹는데 집중했다. 아무래도 그는 그저 나를 질문하면 답해주는 상담사 정도로만 생각한 모양이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뭐?”
그가 떡볶이를 먹다 말고 반드시 눈을 맞추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그만 12월인 겨울에도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가, 갑자지 왜 쳐다보는데. 머, 먹으면서 들어…. 빨리.”
무쌍을 한 그의 눈이 이렇게 맑을 줄은 몰랐다. 동공에 담긴 내 모습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 깨끗한 눈이었다. 적어도 가난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눈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장원을 보면 내가 가진 많은 편견을 긍정적으로 바꿔주는 사람이었음은 분명했다. 그런데 예쁜 눈에 비해, 높은 콧대에도 얼굴에 지방이 많아 남성미가 많이 떨어졌다.
역시 나도 어쩔 수 없는 얼빠인가….
좀처럼 후끈거림이 가시지 않았다. 이런 둔탱이를 보고 왜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좀처럼 복잡한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너는 뭐 좋아해?”
“나?……”
“응, 너.”
“나는 연속극.”
“연속극? 그게 뭐야?”
“아침 드라마야.”
생각지도 못한 고상한 취미에 그만 얼이 나가버렸다.
“무슨 취향이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