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날
2
7장
창틀을 타고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할머니의 백옥빛 피부에서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따스한 볕에 덩달아 기분이 좋은지 의식이 없어도 할머니의 표정은 한층 밝아 보였지만 그저 호흡기를 달고 남은 삶을 연명할 뿐이었다. 장원이 간이의자를 당겨 앉아 할머니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지금 할머니의 손은 10년 전의 할머니의 손과는 또 달랐다. 10년 전의 할머니의 손은 굳은살이 이곳저곳 박혀 있어도 생기가 있었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손을 잡은 지금은 온기조차 없다. 갑자기 억제했던 감정이 휘몰아쳤다. 붉어진 뺨 위로 눈물이 턱 끝을 향해 마침내 할머니의 손등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자욱하게 뜬 눈으로 바라보는 할머니의 모습이 서리가 낀 것처럼 흐려졌고, 이내 작은 힘에도 할머니의 손을 다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잡아 흐느낌을 곁들었다.
감정을 추스른 원이 마른 수건에 물을 묻혀 할머니의 손과 팔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시든 꽃처럼 메말라가는 할머니의 손에 조금이나마 생동감을 불러일으킬 때쯤, 병동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의사 가운을 입고 지천명에 가까운 한동원 원장이었다. 그가 장원의 뒤로 걸음을 멈춰섰다.
“보호자님의 뜻에 따라 따로 연명치료는 하지 않았습니다. 무의식이라도 내면의 고통은 상당하셨을 겁니다…….”
눈과 이를 질근 물며 고통이라는 말을 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할머니의 손에 미세한 떨림이 전해지지 않도록 맨주먹을 불끈 쥐고선.
“나중에요… 나중에 제가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병원장이 가슴에 무거운 짐을 지고는 병동을 벗어났다. 살아생전 할머니는 연명치료를 거부하였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삶을 이어가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해선 안 될 짓이라며 강하게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이승에서의 행복과 슬픔 그리고 행운과 불행은 다 이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며 이치대로 남겨둘 수 있는 건 이승에 남겨놓고, 갈 사람은 가야겠다며 입이 닳도록 얘기하고는 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좀처럼 상황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세상에 남겨지는 것은 할머니가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바보처럼 후회하는 것은 다 부질없었다. 부질없다고 해도 재력, 명예를 바꿔서라도 할머니의 목숨을 살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다며, 10년 전 미국행이 점점 후회로 물밀듯 밀려왔다. 가난해도 할머니와 함께 후회 없는 나날을 보냈어야 했다며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쳐대는데 억세게 흘러내리는 눈물은 모난 나를 질책하고 책망한다. 또한, 방향을 잃는다. 한번 방향을 잃어본 경험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그 순간이 얼마나 절망으로 다가왔는지는 아직도 머리와 피부가 그때를 온전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추억으로 지금을 달래고 싶지는 않다. 할머니와의 약속을 깰 수 없으니. 그저 온전히 할머니가 건강을 되찾기만을 미래를 향해 기도해본다.
*
“할머니 상태가 어떻습니까.”
책상 위로 모니터 하나를 두고 장원과 한동원 원장의 대화가 이어졌다. 원장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근심으로 내려앉은 그가 사실을 말해야 할지, 선의로라도 거짓말을 하며 마음을 달래줘야 할지, 무게추를 양 손에 들며 얹을 곳을 고민하고 있었다.
“있는 사실 그대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슬픔에 젖은 장원의 눈은 어느새 종적을 감췄고, 차분한 마음으로 등받이에 기대며 접점 없는 한 곳만 시나브로 응시했다. 마침내 원장이 마른침을 입술에 바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누워계셔서 이렇게 사신 것도 기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게다가 암은 몸 곳곳이 전이되는 바람에 성하지 않은 곳이 없고, 지금은 의식이 없다 해도 살아계신 나날이 고통의 연속일 겁니다.”
“그럼, 얼마나 사실 수 있는 겁니까?……”
“심부전으로 내일 운명하셔도 이상할 게 없지만, 나이가 들면 장점이 하나 있죠.”
“장점이라면은?…”
“행동, 생각 뭐 숨쉬는 것까지 모든 게 느려지는데, 암 전이나 병세도 마찬가지긴 합니다.”
이기적이어도 그렇게라도 해서 할머니가 더 살 수 있음을 염원했다. 반대로 의사의 말대로라면 할머니가 겪어야 할 고통은 더 길어진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회사가 기울 뻔한 상황에도 가슴에 비수가 이렇게 깊숙이 날아든 적은 없었다.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나침반이 있었기에 방황 속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었지만, 지금 나는 숨을 쉬는 방법마저 잊어버린 나머지 호흡이 과호흡 상태로 접어들었고, 아득히 멀어지는 눈앞이 점점 흐려지다가 이내 정신을 잃은 기억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데려다 줄게.”
우성이 겉옷을 챙겨 입더니 현관으로 걸어왔다. 지수가 택시 타고 가면 된다. 거절했지만, 이미 얼굴이 세상에 드러났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택시를 타고 가면 사람들의 눈매를 맞을 수도 있다며 그가 딱 잘라 말했다. 결국,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와 우성의 차량을 탑승해 집으로 향했다. 국도를 질주하는 주변은 이미 어스름이 내려앉아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땐 고마웠어.”
“뭘?”
“그냥 그렇다고.”
괜스레 이석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가 장난기 많은 그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토사물을 쏟은 걸 빌미로 괴롭힐지 몰라 애써 말을 아꼈다.
“뭐든 감사받는 건 좋으니까.”
“내 기억에도 남아있었다면 오빠가 좀 더 애틋하게 느껴졌을까?”
운전하던 그가 그게 무슨 말이냐며 힐끔 훑더니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강우성이었다. 그런 강우성을 옆자리에 두고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헛헛한 마음이 드는 건, 장원이 미국으로 돌아갈 날이 5일밖에 남지 않아서일까. 그게 아니라면, 2년이나 함께 사랑해온 두 사이를 갈라치기라도 할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어서일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데, 나는 왜 아직도 장원에게 마음이 향하는 건지, 이 감정이 그저 원망스러울 뿐이다. 지구 종말이라도 닥치는 초읽기처럼 하루가 접어들수록 마음의 두려움은 억겁으로 커져 어느 쪽이든 우성 오빠한테는 못할 짓이었다.
“내 기억에도 오빠가 있었다면, 시사회장에서 오빠를 보고 엄청 좋아했을테구. 오빠 나오는 드라마 보며 뿌듯해서 매일 친구들한테 자랑했을지도 몰라. 그치?”
“기억을 못 했으니까, 우리가 이제 만난 거겠지.”
“그러게…. 그래도 만날 사람들은 어떻게든 만나나 봐.”
우성은 입꼬리를 최대한 끌어당겨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니 만나 뵙고 가면 어떨까? 오랜만에 궁금하기도 하고.”
“그러자. 엄마도 엄청 반가워하실 거야.”
우성의 SUV가 집 앞으로 천천히 주차를 마쳤다. 시동이 꺼지자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우성과 지수가 내려 나란히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일을 하던 엄마는 우성을 보며, 아니나 다를까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 소녀처럼 꺄악,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성을 격렬하게 끌어안고는 진심 어린 애정을 표현하는데 눈 뜨고는 못 볼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컸니? 내가 아는 우성이가 맞아 정말?”
“네….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뭐야. 어머니라고 해야지. 열애설도 난 마당에.”
“지금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재밌게 잘 보고 있어. 근데 상대 여배우 걔는 왜 이렇게 소갈머리가 없는 거야? 보는 내내 정말 화통을 삶아 먹는 줄 알았다니까.”
월등히 빼어난 외모에 숨겨졌던 엄마도 나이는 못 속이는 법이었다. 드라마를 보며 철딱서니 없는 아줌마가 되어버린 걸 보니.
“그러게 말이에요….”
우성이 흥분한 엄마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나중에 작가한테 말해서 꼭 복수해달라고 해. 안 그럼 아줌마 잠 못 잔다. 하하핫. 근데 둘의 관계는 어떻게 된 거야? 나 당사자한테 듣고 싶어서 네 엄마한테도 안 물어봤잖아. 어떻게 드라마보다 더 재밌어.”
숨도 쉬지 않고 말하는 엄마를 보니, 엄마는 배우가 아니라 래퍼를 해야 했다.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엄마는 식탁에 앉으라며 우성의 팔을 잡아 의자에 앉힌 후 지수와 맞은편 자리를 차지했다.
“어머님은 여전하시네요.”
“사람이 쉽게 변하겠니?”
엄마가 소녀처럼 손등으로 입을 가려 호호호, 웃는데, 어째선지 지수의 낯에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엄마 왜 그래…. 낯설게 정말.”
“내가 잘생긴 사람을 너무 오랜만에 봤잖니? 맨날 똑같은 일상에 집안일만 하다가 우성이 보니까 도파민이 샘솟나보다.”
아빠에게 사랑받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처음보는 광경이기는 했지만, 엄마가 다른 쪽으로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은 살아생전 처음 보는 듯했다.
뭐, 행복하면 됐다.
엄마와 우성은 24년 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마침 퇴근하고 집으로 돌어온 아빠가 우성이 왔다는 소식에 양손 가득 치킨을 들어 반갑게 맞이했다. 어릴 때 함께 있을 때면 늘 치킨을 시켜 먹던 모습 그대로 식탁에는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치킨을 먹었고, 못다한 이야기는 마저 이어갔다.
***
눈을 떠보니 새하얀 공간 속에 푸릇한 아침을 맞이했다. 다급히 할머니를 찾았지만, 1인실 VIP 병동에 할머니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마침 이 실장이 사복차림으로 할머니는 아직 괜찮으시다. 말하며 병동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실장이 병상 옆으로 묵묵히 걸어와 멈춰 서더니, 아니나 다를까 “20대가 이리 비실비실해서야…”라며, 잔소리를 해댔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꿈이 아니라는 것을 직시할 수 있었다.
장원이 고개를 저어 밖을 내다보는데, 밖은 새가 씨앗을 물어와 잔디에 이리저리 뿌리며 노는 것이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행복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에 원인 모를 미소가 지어졌다.
“아직 살만한지? 웃음이 나는 걸 보니.”
잔소리에 꼬리를 무는 이 실장은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낭떠러지에 서 있을 때면 항상 곁을 지켰던 건, 단 한 사람, 이 실장이었으니까.
“본사를 바꿔보는 건 어때?”
그런 이 실장의 발언에 장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한국지사를 본사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몰라서 그래?”
“너 그거 자격지심이야.”
장원이 자격지심이라는 말에 유독 이 실장을 경계하는 눈빛이 서렸고, 팽팽해진 기 싸움은 주변으로까지 무겁게 내려앉았다.
“자격지심?”
“너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야. 대한민국에서는 원래 학벌 낮고 성공 못 하면 사람 취급 못 받는 거 다 똑같아. 다들 그렇게 자존심 구겨가면서 살고. 그래도 한국만한 곳이 없어. 반대로 성공하기만 하면 무한한 사랑과 정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이 나라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만….”
“그만해.”
장원이 적절한 타이밍에 이 실장의 말을 잘랐다. 길게 말해봤자 의미 없을 거로 생각했는지 그녀도 간이의자를 빼 앉으며, 다리를 꾀어 벽에 등을 기대었다.
“어쨌든, 한국으로 본사를 움직이는 건 한 번 고려해봐. 시가총액 400조 기업이 넘어온다면 정부도 두 팔 벌려 환영할 거고, 세금 절감 포함해서 시스템 입지까지 구축하는데 유리한 독점권도 쥘 수 있어.”
이 실장이 지그시 눈을 감고, 벽에 머리를 기대며 넌지시 말했다.
“알겠어…….”
“한 가지 더.”
“인생삼불행(人生三不幸)…. 그 말 하려고?”
이 실장이 그렇다며 두 어깨를 으쓱했다.
베면 피도 안 나올 것 같은 그녀가 믿는 유일한 미신 중 하나였다. 그녀가 믿는 인생삼불행(人生三不幸)은 인생 3대 악재 중 하나이자 가장 기피하는 것이 소년등과(少年登科)였다. 그런 그녀가 인생삼불행에 하나라도 해당하는 인간은 인생이 평탄치만은 않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거듭 강조하고는 했다.
“그래서 내가 보낸 답은?”
장원이 이 실장을 기피한 것은 자격지심보다도 문자에 대한 답변 때문이었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던 눈길을 그만 창가로 돌리고 말았다. 마침내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는 듯 그가 눈을 감고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만나볼게.”
뜸을 들던 장원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원이 본가를 다시 찾았다.
삐걱대는 현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은 여전히 곰팡내가 진동했고, 벽지 장판 모두 누렇게 바래있었다. 장원이 신발을 벗어 늘 앉던 자리에 벽을 등지고 눈을 감았다.
어째선지 감은 눈으로 눈물이 서슴없이 흘러내렸다. 순서가 잘못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며 28년을 용서하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원망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는데….
감았던 눈을 지그시 뜨며, 장원이 이 실장이 보낸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경기도 광주시 겨울동 112.]
장원이 다시 눈을 감으며, 저물어가는 노을이 닫힌 창으로 여울져왔음에도 그는 미세한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 번의 선택과 행동에는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집중이 필요했으니까.
*
세단의 방향을 바꾸며 문자메시지에 적힌 주소를 따라 바퀴가 힘차게 고속도로를 달렸다. 한 시간 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밭을 따라 포장조차 되지 않은 길목 위로 솟은 허름한 주택이었다. 허름한 주택은 80년대 아궁이를 떼 불을 지피는 방식의 온돌 집이었고, 현관은 금이 간 유리 위로 갈색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 뺨까지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막아 더 이상 떨어지기를 막고 또 막았다. 마침내 마음을 추스른 장원이 운전석에서 내려 포석을 밟아 현관문 앞으로 섰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쥔 주먹으로 문을 쿵쿵쿵, 천천히 때리더니 잠시 후 안에서 “누구세요….”라는 힘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내 목소리가 발걸음으로 바뀌면서 마침내 문이 열렸다. 할머니보다 더 야윈 몰골을 한 증년 여성이었다.
엄마다.
모든 시간이 멈춘 듯했다. 성공한 것을 제외한 나는 모든 것이 하자 덩어리였다. 흔한 부모조차 없으며, 고등학교 졸업장조차 없다. 성공은 그 모든 단점을 감추어줬지만, 내 내면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도 늘 살얼음판을 걷는 고통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고는 했다. 인생에서 한 번의 선택이 중요해진 이유는 살얼음판을 걸으며 오는 여러가지 경험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삶은 희로애락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태풍 속의 눈과 같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감정도 내 마음을 휘몰아치지 않았다. 그저 태풍이 지나간 잔잔한 바다 위로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낯설기만 하다.
야위었어도 엄마라는 것쯤은 한 눈에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런 엄마가, “어떻게 오셨어요?”라며 묻는다.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크게 성공해서 매스컴에도 오르는 나를. 이름이나 한번 들어봤을 법한 나를. 어쩌면 나를 알아보고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에 성공한 것도 일부 있었지만, 어머니의 상황은 가장 밑바닥의 인생이었다. 이런 어머니의 인생은 자식조차 알아보는 것은 사치라며 대변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노력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막상 만나보니 낯설게 느껴지는 것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아직 현실감이 떨어져서 일까. 그것조차 아니라면, 나를 알아보지 못한 부모에 대한 배신감인 걸까…. 모르긴 몰라도, 그저 어머니가 밉다. 너무 미워서 원망스럽다.
“구청 직원이에요……. 거주 사실 확인차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똑같이 모른 척 했다.
“확인되었으니까,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머니께 머리를 조아리고 차량에 탑승해 비포장도로를 천천히 나아가는데, 문고리를 잡은 채 빤히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룸미러에 담기는 모습을 보고, 고요했던 마음이 그제야 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문고리를 잡은 그녀의 손 위로 눈물이 뚝, 뚝, 떨어지기는 매한가지였다.
마음을 대변하듯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다행히 광주만 소나기가 내렸는지, 서울에 진입할 무렵에는 어두컴컴했어도 갠 하늘에 보름달이 영롱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달빛을 가르며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린 세단은 결국 집 앞에 조용히 멈춰 섰고, 장원이 조용히 화장실로 가 밸브를 열어 쏟아지는 물에 옷뿐만 아니라 뜨거운 눈물까지 함께 씻겨내려 보냈다.
***
“왜 가려고 그래. 하룻밤 자고 가지. 지수 방 혼자 자기도 넓은데.”
“엄마! 진짜 못하는 말이 없어.”
“배우는 원래 무대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어. 엄마가 판 깔아주잖아.”
으이구….
밤이 늦은 바람에 우성은 어쩔 수 없이 다음에 또 찾아뵙겠단 말만 남기고 돌아갔지만, 돌아가고 난 집은 어째선지 먹구름만 가득했다.
“아니 오늘만 날이냐고. 왜 그렇게 축 처져 있는데.”
소파에 앉은 엄마 옆으로 지수가 철썩 앉으며 말했다.
“고민이 돼서 그래, 고민이!”
“무슨 고민?”
우울감과 갱년기가 함께 온 엄마의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아 지수가 엄마를 향해 몸을 고쳐 앉았다.
“장원이냐, 우성이냐. 신랑감은 어느 쪽이든 완벽하잖아.”
“정말 희대의 고민이다.”
머리가 아픈지, 지수가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우성에게 전화를 걸며 방으로 들어왔다.
“어. 나야 오빠. 오늘 엄마 기분 맞춰주느라 고생 많았어.”
[고생은 뭘. 오랜만에 아주머니 만나서 얼마나 좋았는데. 오랜만에 치킨 먹으니까 옛날 생각도 많이 나더라.]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내가 시간 되면 밥 살게.”
[한도 많지? 내가 보기보다 탑 배우라, 일반적인 식당은 공식절차 없이는 못 가거든.]
“어련하시겠어요. 내가 사는 건 이 모양 이 꼴이어도 나 대기업 다니는 여자야.”
[오, 이대 나온 여자보다 있어 보이는데? 작가님한테 이번 대본에 반영이라도 해달라고 해야 하나?]
“풋. 아무튼, 운전 중일 텐데 조심히 가구. 안전 운전해.”
[고맙다. 스캔들은 너무 신경 쓰지 마. 우리만 행복하면 됐으니까.]
“알겠어.”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보니 스캔들에 대한 난제는 결국 해결하지 못한 채 우성의 잔머리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말았다.
“생각할수록 열받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수리 끝으로 스트레스가 차오르는 바람에 바람이라도 쫴야 할 것만 같아 소화도 시킬겸 겉옷을 챙겨 밖을 나섰다. 겨울은 갔지만, 아직 밤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겉옷을 여며 공원을 한 바퀴 돌고자 발걸음을 돌리는데, 익숙한 세단 한 대가 눈에 익었다. 운전석은 선팅이 되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차량이겠거니 싶어 차량 옆을 지나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발목을 잡는 듯 했다. 머무르면 안 될 것만 같은 마음에 그대로 직진하던 중 시동이 걸린 세단이 천천히 바퀴를 움직였다. 이후 좌회전을 하며 종적을 감췄다.
생각하지 말자. 그저 비슷한 차일 뿐이야.
“내 직감 안 좋은 거 알잖아.”
의미부여 하지 말자. 이 또한 우연일 거야.
“맞아. 인생에 우연은 그리 쉽게 찾아오지 않으니까.”
지수는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찝찝한 마음은 내려놓지 못했다. 오늘이 지나면 그가 한국을 떠나는 날은 4일 밖에 남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