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날
3
11장
“니가 그걸 어떻게…….”
지수가 마저 정리하자며 벽에 붙인 등을 뗐다. 그러자 장원이 말해보라며 지수의 팔을 잡으며 가지 못하도록 잡아 세웠다.
“대답 먼저. 어떻게 알았어?”
“말했잖아. 사람 잘못 본 것 같다고.”
갑자기 할머니를 짚고 넘어가는 바람에 장원이 좀처럼 뭐라 물을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 실장님한테 들었어?”
“이 실장님은, 고문 해도 입도 뻥긋 안 할 사람이라는 걸 내가 모를까 봐? 그리고 일일이 대답하고 싶지 않다니까?”
그렇게 장원이 잡은 손을 뿌리치며 지수가 찬장 앞으로 다시 앉았다. 두 번째 찬장에는 할머니가 주로 사용했는지 유자꽃 자수를 넣은 손수건과 캐러멜 색상의 털장갑, 그리고 붉은 목도리가 곱게 접혀 있었다. 지수가 목도리 위로 털장갑과 손수건을 한곳에 모아 놓고는 할머니의 온기를 느꼈다.
“되게 오래됐나보다….”
“어…. 20년쯤 됐을 거야.”
“네가 선물이라도 해준 거처럼 얘기한다?”
“맞아….”
“뭐라구?”
“내가 병설 유치원 다닐 때 담당 선생님이 자수랑 목도리 짜는 걸 좋아하셨거든.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면 목도리를 짜고는 했는데, 그때 선생님께 짬짬이 배웠지.”
“이걸 그럼 네가 다 했다는 거야?”
“응. 무려 1년이나 걸렸지 뭐야….”
지수가 장원의 말에 시선을 내려 확인했다. 다시 보니 목도리 이곳저곳 잘못 옭아맨 부분들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오래 사용한 줄로만 안 건, 잘못 옭아맨 결과물이었고, 자수도 엉성하게 이리저리 보풀이 나듯 실이 빠져나와 있었다. 그래도 유치원생이 한 것치고는 꾀나 솜씨가 좋았다. 좀처럼 공부는 못해도 다른 방면에서는 섬세한 사람이었으니, 여기서 빛을 보았나 보았나 싶은 지수가 목도리를 세심하게 문지르며 나중에 시간이 되면 자수 놓는 법과 뜨개질에 대해서 알려달라 말했다. 장원이 알겠다며 목소리에 대한 사연을 마저 이어갔다.
“근데,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셨어. 내가 그렇게 뗑강을 부렸는데도 할머니는 들은 척도 안 하시는 거 있지.”
“…….”
당연히 그랬겠지. 손주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1년이나 떴다는 걸 알았으면 어떤 부몬들 사용할 수 있겠어.
“나라도 못 쓰겠다…….”
“그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크던지. 그 후로는 늘, 여기에 넣어두시고는 마음 싱숭생숭하실 때마다 꺼내보고는 하셨어.”
숙연해진 분위기 속 지수가 좋은 생각이 났다며, 할머니 가시는 길에 함께 넣어 드리면 되겠다. 말하자, 장원도 좋은 생각이라 생각했는지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좋아하시겠다.”
장원이 할머니의 유품을 조심스럽게 상자 안에 담았다.
“이제 다 된 건가?”
“어.”
장원이 머뭇거리다 고맙다며 지수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지수가 감사는 오히려 자신의 몫이었다며 만약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지 못했더라면 그게 더 큰 슬픔으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말을 아꼈다. 장원이 트렁크에다 상자를 싣겠다며 상자를 들고 밖을 나왔다. 이어 차량 트렁크를 열고 상자를 안으로 넣으며 트렁크 문을 닫는데, 문득 허름한 집 한 채가 20년 전 모습 그대로를 하고 있다 생각하니 괜히 고마움이 느껴졌다. 인간도 노화를 겪는 것처럼 집도 이곳저곳 칠이 벗겨진 곳이 많았고, 지붕은 온갖 풍파에 이곳저곳 데미지를 입어 금세 주저앉을 듯했다. 웃풍이 들던 겨울이면, 추위에 불만을 터뜨리고는 했는데, 금이 간 지붕을 보니 웃풍이 안 드는 게 이젠 이상할 정도였다. 장원이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접고 다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이게 뭐지….”
지수가 찬장 여닫이 문틈에서 종이 한 장이 뚝 떨어지는 걸 보며 말했다. 종이는 삼단으로 빠빴하게 접혀, 혹시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장이 아닐까란 생각에 선뜻 펼쳐볼 수가 없었다. 마침, 장원이 ‘이만 가자.’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지수가 손에 든 종이를 보며 장원도 이심전심인 모양인지 지수와 가까워지는 데까진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장원이 조심히 신발을 벗고 지수가 건네는 종이를 받아 펼쳤다. 종이에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글씨체를 보니 할머니가 쓴 것이 맞았다. 쓰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쓴 글씨 위로 얼룩진 눈물 자국이 번져 있었다. 지수는 편지 내용을 보다 눈시울이 붉어져 그대로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없이 장원은 홀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내 딸.
얼마나 불안했을 것이여. 죽지 못해 살았을 그 심정. 내 못 알아주어 얼마나 애가 떨어지는 마음으로 살았을 것이여. 모난 어미가 그 타들어 가는 마음에 대못을 박았으니 하루하루 숨이 얼마나 막혔을 것이여. 미워서가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널 못 잡아먹어서 여지껏 백옥같던 니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진심이 아니었거늘 이렇게밖에 속죄할 수 없는 어미를 용서하지 말어. 이제 너를 위해서만 빌 것이여. 만에 하나 내 바램이 닿지 못한들, 내 죽어서라도 바람으로 갈 터이니. 어진 마음에 바람이 불어오면 내가 머물다 갔음을 알거라. 그니까 조금만 견디라. 내 하루빨리 이생을 떠나기를 바라고 또 바라컨다. 근데 아직 해야할 일이 남았는가 네 곁을 지키지 못한다. 내 무슨 복이 있어 이리 오래 행복을 주는지. 내 무슨 복이 있어 이리 오랜 삶을 사는지. 내 가거든, 이 받은 행복 네게 다 줄 것이여. 그러니까 어미 가기까지 감기 조심혀.
장원이 종이를 잡은 손을 덜덜 떨며 떨어질 듯한 눈물을 안간힘을 쓰며 견뎠다. 지수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해 장원이 종이를 접어 안 주머니에 넣기까지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꿈속에서 할머니가 가슴에 묻었던 사진 한 장. 그리고 할머니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건, 어쩌면 어머니에게 모든 사랑을 주어서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서운하진 않았다. 할머니께 이생에 받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받았으니까.
*
은영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붙들고 한 걸음씩 내디뎠다. 내디딘 발걸음은 장례식장으로 멈춰 서며 은영이 영정단 위로 놓인 영정사진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실장이 바닥에 닿을 은영을 간신히 잡아 부축하고는 함께 장례식장을 밟았다.
엄마…….
영정단 위로 오른 어머니의 영정사진을 가슴에 품으며 은영이 제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지를 상실한 눈으로 이내 미간이 구겨졌다. 광대는 상승했고, 입가의 근육이 점점 일그러지며 눈가에는 맺힌 눈물이 곧장 광대를 타고 턱 끝으로 떨어져 내렸다. 무슨 자격이 있어 눈물을 보일까 하는 은영의 눈에는 이미 초점이 사라진 후였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한 번만 엄마의 얼굴을 봤으면 싶어 하늘에 손이 닳도록 빌었다. 직접 엄마를 만나러 가기에는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이렇게 엄마의 사진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엄마 심장에 대못을 박은 것도 모자라, 그 심장이 뜯겨나갔을 엄마의 심정을 생각하면, 마치 자신의 생살이 뜯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어떻게든 엄마 품에서 아이를 낳았어야 했고, 그렇게 해서라도 엄마의 품에서 장원을 키웠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한 지금 엄마의 마지막 길도 지키지 못한 채 보내드린 나 자신이 너무 싫고, 원망스러웠다. 너무너무 싫었다.
은영의 슬픔이 두 어깨로 묻어났다. 들썩이는 어깨는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아 부지불식간 장례식장까지 슬픔으로 젖어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 실장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최소한의 두 눈을 감는 애도의 표시를 보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슬픔이 잦아들 무렵, 이 실장이 은영의 옆자리에 서며 말했다.
“아드님께선 금일 식장에는 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쌓인 게 많다면 모두 풀고 가시길 바랍니다. 어머님께서도 그걸 원하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가시는 길은 밖에 기사님이 금일 중 상시 대기하고 있을 테니 조심히 살펴가십시오.”
이 실장이 발길을 돌리던 차 못다한 말이 있는지 잠시 걸음이 멈추었다.
“주제넘은 말일 수 있겠습니다만, 염치불구하고 한 말씀 올리도록 하죠. 선생님께서 버린 한 소년은, 먼 훗날, 한 그룹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현재는 제가 상관으로 모시고 있으며, 결과로만 보면 너무 잘 성장했겠거니 싶을 겁니다. 현재 소년은,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 달하는 생계를 책임까지 지고 있습니다. 고작,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말입니다. 소년은 늘 혼자였어요. 홀로 성공하기 위해 아등바등 발악했고, 낯선 타지에서 마음 둘 곳 하나 없는 그의 안식처는 두 평 남짓한 단칸방이었구요. 소년은 매일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거기서 공부를 하고, 아르바이트로 번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모아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제겐 과분한 자리를 주었구요. 그러니 고맙다는 말은 전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같으니.”
마침표를 찍은 이 실장이 걸음을 옮겼다.
은영은 그녀의 말이 뼛속 깊숙이 들어왔는지 좀처럼 얼굴을 들지 못했다. 준비조차 되지 않은 열아홉에 원이를 임신했고, 아이를 낳아 기르지도 못해 어머니에게 버리고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아들에게 주었으니, 나 하나 갔으면 됐을 지옥을, 그 지옥을 염려했던 어머니의 말이 20년을 돌고 돌아 원의 삶의 비수로 날아들었다.
*
지연이 갑갑한 마음에 병원 문을 열고 나와 선선한 바람을 맞았다. 시끄럽게 굴던 기자들은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밤은 정적으로 풍만했다. 선선한 바람은 마치 뺨을 어루만져주기라도 하는 듯 기분이 한층 가벼워지는 듯했다. 지연이 공원 한 바퀴를 가로등 불빛에 맞춰 걸었다. 걷다 보니, 벤치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 커플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따뜻한 온기를 지폈다. 반면, 남편으로 보이는 남성에게 부축을 받아 걷는 한 여성의 모습은 무척이나 정다워 보였다. 괜스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 때쯤, 지연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뱉었다. 오랜만에 맡는 봄바람에 마음까지 안정되는 듯해 정서적으로도 안정감이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 간만에 대중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공원을 산책하니 스무 살의 자유로웠던 시절이 한 발짝 내디딤과 동시에 주마등을 스쳐갔다. 행복감을 마음에 간직하며 산책을 마친 지연이 로비로 들어섰다. 지연은 장원이 할머니의 병동에 있겠거니 싶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을 향해 올라갔다. 6층에 도착한 지연이 601호로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데, 간이 창으로 보이는 내부는 전등이 꺼진 채 빈 병상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지연이 어떻게 된 일인지 싶은 낯빛으로 병동 문을 열고 들어섰다. 혹시라도 낮에 퇴원을 한 걸까 싶었지만, 내부에서는 조금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퇴원을 했다면, 이틀은 족히 됐겠거니 싶었지만, 그럴 리 없었다. 이틀 전 입원 당시 할머님이 병동을 지키고 있음을 화장실에서 간호사들을 통해 얼핏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건, 오늘 퇴원을 했다는 셈이 된다.
그래서 발길이 뜸했던 걸까….
지연이 스마트폰을 꺼내 장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몇 번이나 이어졌지만, 장원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끊고, 간호 리셉션을 찾아 당직 간호사에게 물었다.
“601호 강옥순 환자분 오늘 퇴원했나요?”
“예? 그, 그게….”
간호사가 장지연을 보며 마른 입술을 입안으로 숨기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예인을 마주한 일반인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던 지라, 그녀가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지연이 잔잔한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러나 좀처럼 대답을 못하는 간호사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지연이 결국 대답을 재촉하고 말았다.
“그, 그게…. 강옥순 할머니. 오늘 돌아가셨어요…….”
“뭐라고요?”
믿기지 않는지, 지연의 굳은 표정이 좀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지연이 간호사에게 강옥순 씨의 장례가 어디에서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 후 인근 10분 위치에 떨어져 있는 한신 장례식장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이동하는 도중 스마트폰을 통해 장원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했지만, 언론에는 단 한 줄의 기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기업의 부고라면 어떻게서든 기자들이 찾아냈을 텐데 이렇게 조용히 흘러가는 건 적어도 대한민국이라면 이치에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장원의 생각을 고려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일을 진행하는 걸 선호했으니 충분히 장례도 조촐하게 진행했을 것을 지연도 모르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택시가 한신 장례식장으로 도착해 멈춰 섰다. 야구모자를 눌러쓴 장지연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가드 한 명이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걸 제지했다. 지연이 하는 수 없이 모자를 벗어 자신의 신분을 드러냈지만, 그럼에도 안으로 들어가기를 가드는 허용하지 않았다.
“당장 안 비켜요?”
지연이 미간을 구기며 가드를 향해 쏘아보았다. 가드는 꿋꿋이 제 제자리를 지키며 자기 일을 묵묵히 이어갔다.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은 지연의 눈에 점점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다. 언론을 보지 않았더라도 인간이라면 장원과 사귀는 사이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최측근에서 장원을 지키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이를 알면서도 이렇게 막아 세우는 걸 보면 안에 분명히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지연이 직감했다.
“내가 이곳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면, 내가 돌아간 이후 더는 당신이 그 자리에 서있지 못할 거란 사실만 알아두세요.”
가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당신 진짜 내가 누군지 몰라서 이래? 나! 장원과 사귀는 사이….”
그는 진심으로 장지연의 얼굴을 모르는지, 아? 하며 닫힌 문을 열어주었다. 세상에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안 지연이 좀 전에 일을 부끄럽게 여기며 얼굴로 수치심이 차올랐다.
“실례했습니다. 이 실장님께서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말라 하셔서….”
“아주 듬직하시겠어요. 그 이 실장이라는 사람.”
지연이 강한 콧바람을 내쉬며 장례식장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복도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정적이 내려 앉았고, 마침 복도 끝으로 한 여성의 슬픈 애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는 절망, 절규, 애환, 슬픔, 행복, 불행 온갖 감정을 가져다 대도 부족한 슬픔이었기에 오소소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 목소리에 다다르자 식장 안으로는 야윈 여성이 할머니의 사진을 품에 끌어안으며 등을 보이고 있었다. 일면식조차 없는 그녀는 분위기며 목소리며 장원을 빼다 박은 게 장원의 어머니였음을 본능이 먼저 느꼈다. 단 한 번도 장원의 부모님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없었다. 늘 부모님의 이름을 거론하면, 장원은 말을 아꼈을 뿐, 좀처럼 대화를 이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에 더 물어보지 않은 것도, 가정사라면 학을 뗐던 자신이었기에 마냥 좋은 이야기로 이어지지 않을 것만 같아서였다. 천년만년 가는 사랑도 없듯이 천년만년 가는 슬픔도 없으니, 어머님의 슬픔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슬픔에 지친 어머니가 벽에 등을 기대어 이지를 잃은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어머니를 잃은 딸의 슬픔,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의 애환. 그 마음이 언제쯤 진정이 될까, 지연도 하염없이 제자리에 서 기다려줄 뿐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흘렀다.
“언제까지 거기 서 계실 생각이에요…. 다리 많이 아프실 텐데.”
“아, 아셨어요?”
은영이 말을 아끼자 지연이 말에 꼬리를 물었다.
“제가 발을 들일 때가 아닌 것 같아서요. 적어도 지금은요….”
은영이 들어오라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시간을 오래 차지했네요. 미안해요….”
은영은 영정단 위로 사진을 다시 올려놓고는 식장을 빠져나갈 무렵이었다.
“저기….”
머뭇거리던 지연의 말에 은영이 걸음을 멈추었다.
“원이 어머님이시죠….”
“예? 아, 아닙니다….”
분명히 거짓말을 하는 것이 맞다. 어미를 어미라고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아니, 전혀 알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못다한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저는 장원과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장지연이라고 합니다. 이제 곧 결혼도 할 계획이고요.”
‘원이한테는 저는 감히 상대도 안 될 만큼 아름다운 여성이 이미 있기 때문이랍니다. 이제 곧 미국에서 결혼도 하구요…….’
며칠 전 지수가 했던 말이 주마등을 스쳐 가자, 은영이 며느리가 될 지연을 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장.지.연.
“아, 그러시군요…. 결혼을 하신다니 축하드려요….”
면목이 없어 은영이 애써 눈물을 손으로 지워가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원이 결혼할 상대라고 하니, 그녀는 더더욱 자신의 존재를 지웠어야만 했다. 자신의 걸음이 한 걸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건 아들의 발목을 잡는 것이기에, 늘 한 걸음 멀리 그가 잘 될 수 있도록, 행복할 수 있도록 비는 것이 아들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심성이 좋은 분 같아요.”
은영이 가던 길을 멈춰, 지연에게 환한 미소를 담아 말했다.
“…….”
세상이 멈춘 듯 주변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연이 말문이 막혀 숨 쉬는 걸 잊은 나머지 잠시 후 과호흡이 찾아왔다. 이미 자리를 벗어난 은영의 발자취를 보며, 지연이 현기증에 벽을 지지 삼아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광대로 떨어지는 눈물 한줄기에는 처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었다는 뜻이 담겨있는 듯했다.
*
초인종이 울렸다. 목욕했는지, 흰색 가운을 입고, 젖은 머리가 축 늘어진 이 실장이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현관은 향을 내는 초가 농염하게 타오르며, 이내 천장에 달린 전등이 짠 하고 불이 켜졌다. 불빛은 이 실장의 안색으로 내려앉으며, 누가 왔는지 마치 예감이라도 하는 듯한 낯을 보였다. 멜로디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열린 문밖으로 장지연이 사나운 눈빛을 보이며 핏대를 세웠다.
“이 야밤에 죽이러 오진 않았을 테고.”
“잠깐 실례하러 왔어요.”
장지연이 이 실장의 어깨를 빗겨가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소파 언저리에서 걸음을 멈추며 휙 돌아 그녀에게 뺨을 강하게 날렸다. 그러나 지수만큼 이 실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날아오는 그녀의 팔목을 이 실장이 손쉽게 잡아챘다.
“이렇게 큰 실례를 범할 줄은. 맞을 때 맞더라도 이유는 알고 맞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어떻게 봐도 제가 위인데, 이렇게 나오면 몹시 곤란해지실 텐데요?”
“왜 말 안 했어요? 다른 일도 아니고 이건!”
“다 큰 어른한테 예절교육이라도 할까요?”
지연이 그제야 잃은 이성을 되찾았다.
“적어도! 제게 먼저 말했어야 순서가 맞는 거 아니에요?”
“왜 그래야 합니까? 장지연 씨는 회사와 전혀 무관한 사람일뿐더러 그 누구도 장지연 씨에게 부고에 대한 사실을 알리라 지시한 부분도 없는데 말이죠?”
“장원은 정신이 없었다고 쳐도! 당신만큼은 이러면…”
이 실장이 아일랜드 식탁 위로 놓인 와인을 들어 잔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잔 하나를 지연에게 건네며 넘칠 듯 말 듯한 용량을 부었다. 이어 자신의 잔에도 꽉 채웠다.
“그거 아십니까. 대표님이 그러더군요. 장원에게 할머니는 세상에 전부지만, 적어도 당신에겐 아니라고요. 장원은 그런 당신과 결혼까지 하기 위해 어젯밤 미국으로 떠날 계획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알아보니, 장지연 씨의 모친께서 자택에 방문하시고, 무슨 이유에선지 당신은 홧김을 주체하지 못하고 교통사고를 냈더군요. 굴러 온 돌도 제 발로 박차고 나간 마당에 이미 당신은 두 번의 기회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삼진아웃이 된다면, 음….”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어?”
“힘이라는 건 그런 겁니다. 대표님과 엮인 모든 인간의 정보가 필요하죠. 약자는 이를 감시라 표현하고, 강자는 이를 보호라 표현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않고 지킬 수 있으니까요.”
이 실장이 바닥을 보인 와인잔을 식탁 위로 올려놓고는 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괴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신이 내리는 기적, 운, 운명과 같은 무용한 것들을 증오하지만, 최근 애로스의 화살이 당신에게 향하기를 기원했습니다. 운명이라는 것을 이겨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 무용한 것들을 인간이 쥐락펴락하기에는 한없이 무력하고, 이 무력함을 이용해 신은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하며, 때로는 인간의 간절함에 그 문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자신의 멋대로 말이죠. 그런 당신은 그 희박한 확률을 부여받았음에도 굴러온 돌을 제 발로 차고 말았죠. 대표님께서도 그러더군요. 재수(財數)라는 건 숨을 쉬는 한 모두에게 도박과 같다고.”
장지연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때는 자신의 적이었고, 때로는 같은 편이었다고 생각한 이 실장이 이번에는 자신에게 동정을 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손을 내밀어 방법을 찾거나, 아니면 늘 그랬듯이 홀로 후폭풍에 맞서거나. 그러나 지연의 선택은 당연히 후자였다.
“잘난 듯 말하는 게 좀 역겹네.”
“뒷걸음질 치다 괜히 똥밟지 말라는 겁니다.”
적막이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서 이 실장이 와인잔에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자존심을 구긴 지연이 현관을 박차고 나갈 무렵 이 실장이 반쯤 딴 와인잔을 뱅뱅 돌리며 혼잣말을 이어갔다.
“삼진아웃.”
*
은영이 가드로 보이는 남자의 차량을 타고 고속도로를 향해 내달렸다. 가드는 지연에게만큼은 무거운 입을 보였지만, 은영에게는 좀처럼 따스한 눈길과 말을 전했다.
“좀 눈을 붙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은영은 괜찮다며 걱정해주어 감사하다는 말만 남기고는 어둑해진 창가를 다시금 바라봤다. 문득, 궁금증이 생긴 은영이 운전하는 가드에게 혼잣말하듯 말했다.
“선생님도, 대표님이라는 분과 함께 일하시는 거에요?”
“네. 장 대표님의 운전을 간간히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말씀 낮추셔도 됩니다.”
말을 낮추라는 말에 은영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나머지, 적적한 분위기를 깨주고자 가드가 입을 열었다.
“장 대표님의 어머님 되시죠?…”
은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을 아는지 가드가 대화의 흐름을 조금만 틀었다.
“장 대표님에 대해 궁금한 거 없으신가요? 제가 아는 한 모두 말씀드릴게요. 대신, 대표님께는 비밀로 붙여주셔야 해요.”
그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원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산을 이룰 정도로 많았지만, 은영은 좀처럼 쉽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좋은, 분인가요?”
“물론이죠. 굉장히 신사적이시고 정직하신 분입니다. 나이 못지않게 가진 어른스러움이며, 나이 많은 저도 정말 많이 보고 배울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