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왕비록 03권
암왕비록 03권
암왕비록
03
소그미
암왕비록 03권
차례
제11장.
제12장.
제13장.
제14장.
제15장.
암왕비록 03권
제11장.
양수복의 눈빛이 효과가 있었던지 정인이 격앙되었던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미안해요. 너무 흥분했네요.”
“괜찮소.”
“그리고 눈물 나게 기뻐요.”
“……?”
“그런 눈으로 바라봐 줘서. 방금 내 아픔에 공감한 거 맞죠?”
“…….”
“아니에요?”
“아니지 않소.”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공감했다는 말이오.”
“아!”
양수복은 입술을 씰룩였다.
어째서 시인한 걸까. 왜 이런 유치한 대화에 응했을까.
스스로의 낯선 태도에 당혹스러워하던 양수복은 경신의 속도를 늦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화사한 웃음을 되찾은 정인이 갑자기 멈춰 서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디 안 좋소?”
“안 좋긴요. 너무 좋아 탈이 날 지경인데.”
“…….”
“그냥 가슴이 벅차서 그래요. 양 가가하고 일심(一心)이 되었잖아요. 이제 동체(同體)만 되면…….”
“갑시다.”
“잠깐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안아주면 안 돼요?”
“…….”
“아, 같이 가요!”
* * *
동편에 떠올랐던 반달이 어느새 서천으로 기울었다.
인적 없는 길을 골라가며 낮밤 없이 질주한 양수복과 정인은 일출을 얼마 앞두고 풍양산맥에 이르렀다. 도천은 일천이백 리에 걸쳐 뻗어있는 산줄기의 북쪽 끝자락에 있을 터였다.
운해를 발아래 둔 봉우리에 올라선 정인이 탄성을 발했다.
“와아! 산세가 무지하게 웅장하네요. 여길 보니 장산이 얼마나 초라한 곳인지 알겠네요. 대궐과 초가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과장된 비유는 아니었다. 풍양산맥은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대산맥인 데다 풍광 또한 수려하기로 유명했다. 반면 장산은 크기도 작거니와 돌투성이 민둥산인지라 볼품없는 걸로 알려져 있었다. 정상의 높이도 이삼십 장에 불과했다. 검산이란 별칭만 아니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언덕이었다.
“언제쯤 해가 뜰까요, 양 가가?”
야천을 올려다보며 정인이 물었다. 양수복은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반 시진가량 남았을 거요.”
“그렇겠죠? 그럼 어떻게 할까요?”
“뭘 말이오?”
“바로 갈까요, 아니면 날이 밝은 후에 갈까요?”
“아무래도 상관없소.”
“그러지 말고 정해줘요.”
양수복은 구름바다 위로 솟은 수천 개의 섬들을 둘러보았다.
“도천은 이 산맥의 북단에 있다고 들었소. 저기 보이는 삐딱한 기봉(奇峯)이 향천사봉(向天斜峰)인 듯싶소. 그렇다면 도천까지는 삼사백 리 거리요. 지금 출발하면 해가 뜰 무렵에 당도할 수 있을 게요.”
“바로 가잔 말이군요. 근데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요?”
“…….”
“나는 좀 쉬어갔으면 좋겠는데.”
“…….”
“기껏 정해달라고 해놓고는 딴소리한다고 언짢아하지 말아요. 양 가가를 위해서 그러자는 거니까. 아직 내상이 아물지 않았죠?”
“…….”
“또 그런다. 입술 말고 말로 대답하라고요.”
“…….”
“짧게라도 운기조식하고 가요, 우리.”
정인이 흙바닥에 가부좌를 틀었다. 양수복은 선 채로 내기를 일주천하며 내부를 점검했다. 정인의 우려처럼 내상은 완치되지 않았으나 하루 전보다는 한결 나아졌다. 더욱이 장도를 오며 육신을 혹사시킨 덕분에 아직 녹지 않고 단전에 박혀있던 용단의 일부가 체화되었다. 이로 인한 공력의 증가는 무위 상승으로 이어질 터였다.
기껏 좌정해 놓고서 정인은 운공에 들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그녀는 강하겠죠? 두렵진 않지만 긴장되긴 하네요. 하지만 이길 수 있을 거예요. 그녀와 산주의 대결을 보았다던 할아버지 말로는 내가 상성상 유리할 거라고 했으니까. 양 가가가 방해꾼들을 막아주기만 하면 반드시 승리할 테에요. 그래줄 거죠?”
“그러겠소.”
“고마워요. 실은 그게 유일한 걱정거리였어요. 도천의 칼잡이들이 검산 검사들처럼 관전자 노릇만 할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니까.”
“…….”
“어제 새벽 그 덩치하고 손을 섞어본 것도 도움이 되었어요. 자신감이 붙었으니까. 그녀가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어요.”
“창왕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을 게요.”
“알아요. 아무려면 그걸 몰랐을까 봐. 덩치하고 부딪치자마자 간파했죠. 정상이 아님을.”
“…….”
“비밀 하나 알려 줄까요? 실은 덩치와 첫 수를 교환하기 전엔 좀 떨렸어요. 할아버지가 천하의 누구보다 뛰어날 거라 찬탄하는 내 기감이 덩치가 나보다 극미하게나마 상수임을 알리고 있었거든요. 양 가가가 곧 나올 거라 믿고 일단 붙긴 했지만 언제든 손을 거둘 작정이었죠. 덩치한테 밀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진짜 상대와의 결전을 앞두고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요.”
“…….”
“실망했나요? 에이, 솔직하게 말하지 말걸.”
“나에 대해서는 어땠소?”
“뭐가요?”
“천하제일이라는 당신 기감이 어떻게 판단했느냔 말이오. 우리 간의 우열을.”
“아! 안 그래도 기회가 되면 그 얘기를 하려 했는데. 참 이상한 경험이었어요. 그 녀석이 글쎄 분명 양 가가를 한 수 아래라고 알리고는 막상 임전태세를 갖추니까 난리를 치지 뭐예요. 싸우지 말라고.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따르기로 했죠. 나중에 찬찬히 분석해 보니 뜻밖의 답이 나오더라고요. 나는 내 기감이 부상을 염려해 싸움을 말린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 양 가가에게 겁을 먹은 거였어요. 사실 지금도 혼란스러워요.”
“…….”
“만일 우리가 그때 겨루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모르겠소.”
“내가 오늘 그녀를 꺾고 양 가가의 내상이 다 나으면 정식으로 한 판 해요, 우리.”
“그럽시다.”
* * *
무한정 이어질 것 같던 기나긴 산악이 마침내 끝을 드러내었다. 멀리 탁 트인 평야가 시야에 들어오자 정인이 소리쳤다.
“다 왔네요. 근데 어디 있죠?”
양수복은 검지를 들어 왼편 아래쪽을 가리켰다.
“도천은 지하에 있다고 들었소. 아마도 저쪽 어딘가에 입구가 있을 게요.”
“저렇게 근사한 옥토를 두고서 어째서 개미들마냥 땅속으로 기어들어 갔을까요? 이름도 거창하게 ‘칼의 하늘’이라 지어놓고서.”
양수복은 정인이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는 건지 궁금했다.
도천을 세운 이는 전설적 무존(武尊) 고추(高秋)였다.
북방의 변방 출신인 고추는 정파 호중 허가의 구영도군, 사파 벽력도문의 천강어린도, 그리고 마도의 당대 도마(刀魔)를 연파함으로써 백만 도객의 정점에 올랐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진군했다. 그 과정에서 정사마의 내로라하는 강호들이 그의 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로써 고추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천하제일인에 등극함과 동시에 사상 최초로 도왕(刀王)이라는 영광스러운 별호를 부여받았다.
여기서 그쳤으면 고추는 무패의 전적과 함께 신화로 남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발 더 나아갔다. 그보다 이 갑자 이전에 그처럼 무적행보를 펼치며 압도적 일인자로 인정받았던 철검무적마저 능가하고자 한 것이었다.
물론 철검무적은 이승을 뜬 지 오래였기에 그와 직접적으로 우열을 가릴 수는 없었다. 하여 그의 후인과의 대결은 필연적인 결론이었다.
대담하게도 그의 업적을 기록할 사관 한 명만 대동하고 검산을 찾은 도왕은 방문의 이유를 밝힌 후 그가 원하는 자격을 갖춘 이와의 일전을 요구했다. 당시 검산의 산주였던 청검(靑劍) 오산(吳山)은 고추의 비무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날의 결전을 관전했던 사관은 둘의 승부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용호상박!
비등한 전력이었고 결국 무승부로 종결되었으나 굳이 대응시키자면 청검이 용이었고 고추는 호랑이였다. 고추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강호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고추 자신의 자괴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설욕을 다짐하며 검산을 떠난 고추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지나친 수련의 역효과로 내상이 만성화된 탓에 무력이 오히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의 전성기가 지나갔음을 자각한 고추는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낙담했다.
삶의 의욕을 잃었던 고추로 하여금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도록 부추긴 이는 그의 죽마고우이자 책사 노릇을 했던 마방(馬防)이었다. 마방은 무적철검이 그랬듯 무공일도에 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이들의 폐쇄적인 결사체를 형성하고 그곳에서 잠룡들을 길러냄으로써 무림사에 검산을 넘는 족적을 남길 수 있으리라고 역설했다. 고추는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뛰어난 기재들을 모으는 한편 대공사에 착수했다. 그로써 도천이 탄생했다.
* * *
정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정말로 도천의 유래를 잘 알지 못하는 듯해서 양수복은 간략히 설명했다.
“도왕은 전인들이 그의 결의를 망각하지 않기를 바랐소. 그래서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 도천을 만든 거요. 검산을 꺾을 때까지는 해를 보지 말라며.”
“그들에게 두더지 노릇을 강요했단 말인가요?”
“…….”
“그래서 밖으로 안 나왔나요?”
“그런 걸로 알고 있소. 도천은 오직 도왕의 염원을 실현할 수 있을 거라 그들이 자체적으로 평가한 도호(刀豪)에게만 출천을 허락했소. 알려진 바로는 지난 이백 년간 총 일곱 차례였소. 그들은 전통에 따라 비무를 기록할 백문서원(百文書院)의 학사 한 명만 데리고 검산 행에 나섰다고 하오. 하지만 한 번만 빼고 전부 도천의 패배로 끝났소. 그나마 그 한 번도 비겼을 뿐 검산의 벽을 넘지는 못했소. 다만 그때는 용호쟁투의 대격전에서 도천 쪽이 용이었던 듯하오.”
“그 무승부의 주인공이 도후였겠죠? 그 여자의 상대는 지금의 산주고요.”
“그렇소.”
“좀 미안하네요. 도후의 등장으로 이백 년 만에 두더지 생활을 청산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을 텐데 나 때문에 다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테니.”
“…….”
“지금 나 비웃는 거예요?”
“…….”
“이건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라고요.”
“이만 갑시다. 날이 밝았소.”
양수복은 도천에 들지 못했다. 구시렁거리며 그를 따라 하산하던 정인이 도천을 코앞에 두고 이상행동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주저앉아서는 신음성을 흘리자 짜증이 일었던 양수복은 장난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를 악물어 턱에 주름이 생긴 거야 그렇다 쳐도 얼굴과 손등의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것까지 장난질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괜찮소?”
정인은 눈을 까뒤집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모로 쓰러져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는 달달 떨기 시작했다.
양수복은 정인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보았다. 그녀의 맥이 미친 말처럼 날뛰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오르고서야 정인은 정신을 차렸다. 땀에 흠뻑 젖은 그녀의 의복이 지난 세 시진 간의 변고를 증거하고 있었다.
달리 도울 방도가 없어 지켜보고만 있던 양수복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별일 아니니까.”
“…….”
“정말이에요. 잠시 후에 있을 대결에 대비해 미리 몸을 예열하다가 실수로 과열시켰을 뿐이에요. 아이, 창피해라. 자신감과는 다르게 조금 긴장했나 봐요.”
“도후와는 다음에…….”
“안 돼요! 보다시피 나는 멀쩡하다고요. 여기까지 왔는데 미룰 수는 없어요. 걱정 말아요. 멋지게 이겨 보일 테니. 어제 내 솜씨 봤잖아요.”
“…….”
“어서 가요. 늦었어요.”
“그러지 말고…….”
“말리지 말라니까요.”
“그 상태로 갈 순 없소.”
“이 상태가 어때서요? 내 몸은 내가 잘 알아요. 이깟 미열 정도로는 끄떡없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