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왕비록 04권
암왕비록 04권
암왕비록
04
소그미
암왕비록 04권
차례
제16장.
제17장.
제18장.
제19장.
제20장.
암왕비록 04권
제16장.
권왕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낯짝이었으나 ‘설명’을 들은 연후엔 양수복의 ‘부탁’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진짜 승부와 무관하게 전날의 일전도 설욕할 참이었다.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순서가 바뀌었을 뿐이다. 마후하고 붙은 후엔 나하고 최종적으로 결판을 내야 한다. 헌데 그러려면 그 여자부터 꺾어야 할 터, 자신 있느냐?”
“모르겠습니다.”
“그 무슨 매가리 없는 대답이냐? 무조건 이겨야 한다. 만약 네가 그 여자한테 패하면 나는 뭐가 되느냐?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될 게 아니냔 말이지.”
“…….”
“내막이 어떠하건 세상은 이미 너를 신후와 견주고 있다. 단순한 천하제일을 넘어 고금제일을 다투는 강자로 인정하고 있단 말이다. 나와 겨루기 전엔 누구에게도 지면 안 된다. 알겠느냐?”
“…….”
“어째서 벙어리 행세야?”
“알겠습니다, 어르신. 사력을 다해 그녀를 물리치겠습니다.”
“그래야지. 좋아, 그럼 그날 정오에 보자. 이리로 부르면 되지?”
“네, 어르신.”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게다. 마후와의 대결을 앞뒀다고 대충 봐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몇 군데 부러질 각오를 하란 말이다.”
“어르신도 조심하십시오.”
“뭐라?”
양수복의 응수에 기가 차다는 기색을 드러냈던 권왕이 곧바로 정색했다.
“잠시 잊었구나. 네게 그럴 자격이 있음을.”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불길이 타올랐다. 권왕의 안광에 실린 뜨거운 승부욕을 양수복은 담담한 시선으로 맞받았다.
* * *
권왕이 열이틀 후의 대결을 기약하며 나간 후 양수복은 석 달 전 검절과 결전을 치렀던 지하광장으로 향했다. 일만 평에 달하는 공터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테두리 암벽 곳곳에 박혀 있던 야명주도 대부분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드문드문 미광이 장마 후의 물웅덩이처럼 고여 있어 전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외부의 침입자들을 살피고 자신은 몸을 감출 수 있는 요처를 찾은 양수복은 그곳에 좌정했다. 그러고는 권왕과의 대화에 앞서 결심해 두었던 바를 실행에 옮겼다.
소진과 정인은 죽었거나 살아 있을 터였다.
양수복은 전자는 상정하지 않기로 했다. 가능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리되면 향후의 계획이나 일정이 무의미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후자라면 두 가지 길로 나뉘었다. 하나는 소진이 자발적으로 비처를 떠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누군가에게 끌려갔을 경우였다.
양수복은 첫 번째이길 바랐다.
이틀 전 소진은 적들이 동원한 법사들에 의해 비처의 진법이 파훼될 위험성이 커지면 무저갱에 난 비상탈출로로 대피할 수도 있다고 했다. 정인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약재의 운반 등 걱정거리가 한둘이 아니었으나 소진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라면 그들을 데려간 자들의 정체가 중요했다. 만약 그자들이 도천이나 창왕의 수족들이라면 소진과 정인은 이미 생사의 경계를 넘었을 공산이 컸다. 하지만 그들을 수중에 넣은 자들이 검산이라면 생존의 확률이 수십 배는 높아질 터였다. 금노를 통해 소진과 정인이 그에게 지니는 가치를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양수복의 뇌리 속에서 여러 경우의 수들에 따른 대응책이 연달아 가지를 치며 수십 줄기로 뻗어나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뿌리는 단 하나였다.
무력회복!
이는 출발점이자 종착지였다. 무력이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고서는 백약이 무효했다. 강력한 무력만이 어지러이 얽힌 난국을 타개할 유일한 방책이었다.
하여 양수복은 때 이르게 승부수를 띄웠다. 원래의 무력을 되찾으려면 공력부터 복원해야 했다. 간신히 응축한 내단과 용단을 다시 풀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목숨을 건 도박이었으나 시간이 너무나 촉박한 데다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 * *
살이 찢기고 근육이 파열되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포기와 안식의 달콤한 유혹에 격렬히 저항하며 공력의 용해와 결성을 되풀이하던 양수복은 어느 순간 고비를 맞았다. 그의 내부를 파괴하며 전신을 휘돌던 내공의 양이 육신이 감내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은 것이었다.
양수복은 진퇴를 두고 고심했다. 눈 딱 감고 한발 더 나아갈까? 성공만 한다면 이왕삼후를 능가하는 공력을 부릴 수 있게 될 터였다. 물론 실패할 시엔 그걸로 끝이었다. 결정적인 갈림길에서 양수복은 자신의 본능에게 진로를 묻기로 했다.
어떻게 할까.
내친걸음, 나아가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본능이 즉답했다.
양수복은 욕심을 버리고 물러섰다. 뼈저린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는 이성의 경고에 순응한 게 아니었다. 그의 진일보를 막은 것은 광장 저편에서 날아온 목소리였다.
“여기 계십니까, 암왕? 저는 일전에 양산에서 인사 올렸던 장소입니다. 전주의 명을 받고 암왕을 뵈러 왔습니다.”
서둘러 화령심공의 집결과 응결을 운용한 양수복은 공력을 다시 뭉쳐두고는 장소의 부름에 응했다.
“이리로 오오.”
장소는 초절정의 고수답게 광장의 구 할을 잠식한 어둠에 구애받지 않고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양수복은 그의 면전에 이른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엎드리려는 것을 말렸다.
“그럴 필요 없소. 그보다 그는 어디 있소?”
오체투지 대신 무릎을 꿇고 앉은 장소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대답했다.
“저도 모릅니다. 저는 다만 전주에게서 이 비첩을 암왕께 전해드리라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양수복은 장소가 건네는 직방형의 첩지를 받아들였다. 내용이 너무도 궁금했지만 공력을 갈무리한 터라 안력을 돋울 수 없었기에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어쨌거나 소진이 건재하다면 정인도 무사할 터였다.
“수고했소. 그가 다른 전갈은 주지 않았소?”
“네.”
짧은 문답 후 장소를 내보내려던 양수복은 아직 그와 할 얘기가 남았음을 알았다.
“바깥 사정을 듣고 싶소.”
“바깥 사정이라시면, 어떤?”
“이왕삼후의 동향이나 강호의 중요한 소식을 알려주었으면 하오.”
“죄송하오나 저는 전주의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그들 다섯 절대고수의 동향을 알 만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호의 중요한 소식에 관해서라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실은 바로 그 소식으로 인해 온 천하가 들썩거리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암왕, 권왕 두 분께서 자웅을 겨루기로 했다는 소식이지요. 대륙 어디를 가건 그 얘기뿐입니다.”
“…….”
* * *
권왕에게 그들의 대결을 세상에 알리도록 부탁한 것은 다목적 포석이었다.
양수복은 최우선적으로 소진과 정인의 안위부터 확인하고자 했다. 만약 소진이 적들에게 포획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대피한 것이라면 소문을 접하자마자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해 올 터였다.
물론 변수는 있었다. 예컨대 적들이 그들의 수중에 든 소진에게 첩지를 쓰도록 강요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경우라도 남는 장사였다. 무엇보다 정인과 소진의 생사 여부를 알게 된 데다 잘하면 적의 정체도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소진이 암문에 그에 관한 유력한 단서를 집어넣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금노와 달리 소진은 무애삼관을 통과했기에 미혼약이 통하지 않을 터였다.
권왕과의 승부를 공표한 또 다른 이유는 마후를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그 일전을 관전하러 올 것이었다. 양수복은 자존심 덩어리인 그녀가 형평성을 맞춘답시고 창왕에 대한 설욕전을 선행하리라 예상했다. 기실 예상이라기보다는 예감에 가까웠지만 왠지 그렇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되면 무조건 이득이었다. 동귀어진이나 양패구상 같은 최상의 결과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둘 중 하나는 상당한 피해를 입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공개 대결을 구상한 마지막 의도는 극한의 상황에서 얻게 될 집중력에 대한 기대였다. 자고로 배수진을 친 이는 배전의 결기를 일으키기 마련이었다. 양수복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그는 특히 그런 성향이 강한 부류였다.
더 물러설 곳이 없는 처지에 스스로를 몰아넣음으로써 양수복은 최상의 정신 상태를 갖추고자 했다. 승산이 희박한 도박에 나서고도 현재까지는 판돈인 목숨을 간수한 데다 획득한 바까지 작지 않으니 일단은 대성공이라고 해도 무방할 터였다.
적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마후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당연히 관전을 위해 무오왕릉을 다시 찾을 것이었다. 그러고는 그와 권왕의 대결을 지켜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터였다. 다른 때였다면 절대불리의 형국이었을 테지만 이번엔 피차 만만치 않은 국면이 될 공산이 컸다. 마후가 창왕을 견제하고 권왕이 검후를 막아준다면 오히려 우세를 주장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러려면 공력이 적어도 칠 할은 복원되어야 했다. 두 눈이 다 멀었다 하나 도후는 여전히 한 칼로 태산도 쪼갤 절대강자였다.
* * *
장소가 나간 후 양수복은 야명주가 박힌 곳으로 가서 첩지를 펼쳤다. 단심회의 밀영 시절에 지겹도록 보았던 낯익은 필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깨알 같은 글씨로 장광설을 늘어놓았으나 내용은 간단했다. 전날 적들이 동원한 법사들 중 누군가 진법을 연달아 파훼하고 비처의 코앞까지 이르렀던 탓에 도피가 불가피했다는 것이었다. 그 미지의 법사에 관해 추정한 글이 첩지에 적힌 글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첩지를 잘게 찢어 버린 후 양수복은 몸을 푸는 데 전념했다. 장소는 오늘이 팔월 팔일이라고 했다. 권왕이 떠난 지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는 듯이었다. 내일 모레면 그와 다시 만나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양수복은 승패에 연연하지 않을 참이었다. 사실 승부욕이 일지 않아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권왕에게 양보할 생각은 없지만 기필코 이기고 말겠다는 호승심은 더더욱 없었다. 중요한 건 승리가 아니라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여력이었다. 양수복은 그의 적들이 전부 도래하리라는 데 목을 걸 수도 있었다.
“뭘 꾸물거리는 게냐? 해가 중천에 떴는데. 내가 오기 전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어야지. 벌써부터 상수 행세를 하려는 게냐?”
권왕의 볼멘소리가 온 들판을 쩌렁쩌렁 울렸다. 양수복은 대기하고 있던 돌산 암굴을 나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경신을 펼치지 않고 걸어가자 권왕이 허연 눈썹을 찌그러뜨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양수복에게 빨리 오라고 재촉하지는 않고 그저 노려볼 뿐이었다.
양수복은 그를 응시하며 전의를 끌어올리는 권왕에게서 주의를 돌려 사방에서 일렁이는 기운들을 찬찬히 탐지했다. 도후의 위치를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왼쪽 둔덕의 풀숲에 들어있었다. 너무 노골적인 적의를 발산하는지라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코앞에서 들리는 듯했다.
창왕과 검후, 그리고 마후의 은신처는 포착할 수 없었다. 공히 내기를 철저히 갈무리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어쨌거나 우편의 소나무 숲은 아닐 터였다. 그곳은 오대세가의 고수들이 한 겨울의 거지 떼처럼 한데 모여 있었다.
주위를 살피며 권왕에게 다가간 양수복은 그와 이십오륙 보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양 모가 권왕 어르신을 뵙습니다. 삼가 가르침을 청합니다.”
깍듯하게 예를 갖추는 양수복에게 권왕은 콧방귀로 응수했다.
“흥, 시답잖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어서 덤벼라.”
개전을 촉구하자마자 권왕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참, 그 전에 공정한 승부를 위해 같은 꼴이 되자.”
사타구니를 간신히 가리고 있던 천 조각마저 떼버리며 완전한 알몸이 된 권왕이 양수복에게도 탈의를 종용했다.
“너도 벗어라.”
권왕의 기벽에 당황했으나 양수복은 그의 뜻에 따랐다. 그에겐 신세를 졌으니 이 정도의 민망함은 감내해주어야 했다.
권왕처럼 벌거숭이가 된 양수복은 다시 한번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권왕은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며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다. 양수복은 땅을 박차고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은밀한 웅성거림이 일었다.
* * *
저잣거리의 건달들처럼 마구잡이로 치고받으며 관전자들을 놀라게 한 양수복과 권왕은 원초적인 주먹질의 교환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충돌했다.
권왕의 팔꿈치 공격을 허리를 젖혀 흘려낸 양수복은 뒤로 기울어지는 자세 그대로 그의 하초를 걷어찼다. 권왕은 무릎으로 방어하며 양수복의 다리를 붙잡았다. 양수복도 잽싸게 권왕의 종아리를 낚아챘다. 서로에게 발목을 꺾을 각도를 허용하지 않으려고 뒹굴뒹굴 구르던 두 사람은 동시에 튕기듯 일어섰다. 그러고는 바로 엉겨 붙었다.
유술기의 공방전은 일차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누구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하며 상대를 깨물고 조르고 비틀어대던 양인은 암묵적인 타협을 보고 떨어졌다. 이대로 가면 체력싸움이 될 터인데 그러한 전개는 둘 다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권왕은 그렇게 하다 한 끗 차이로 패한 지난번의 악몽을 되풀이하기 싫었을 터였고 양수복도 근래 육신의 단련에 시간을 할애할 여유가 없었던지라 이런 식으로 서로의 체력을 갉아먹는 소모전은 부담스러웠다.
떨어진 직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권왕의 호흡을 뺏을 기회를 엿보던 양수복은 그가 들숨에 득달같이 달려들자 헛바람을 들이켰다. 양수복의 허를 찌르는 데 성공한 권왕은 단숨에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권왕의 파상공세에 밀린 양수복은 좀처럼 반전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퇴보를 거듭했다. 승기를 잡았다고 여긴 듯 권왕은 조기에 끝을 내겠다는 심산을 만면에 드러내며 전력을 쏟아냈다.
사력을 다하면 양패구상이 가능할 성싶었으나 양수복은 구태여 무리하지 않고 패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뜻밖의 변수가 발생했다.
쉿!
뱀의 혓바닥소리를 내며 양수복의 우안을 노리고 날아든 권왕의 중지와 검지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미 양수복이 고개를 비틀어 피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권왕은 어느새 왼손의 형태를 수도로 바꾸고는 양수복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하지만 이 회심의 일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양수복이 권왕의 손날이 파고들 공간을 허용하지 않고 목을 밀착시켰기 때문이었다.
권왕의 입장에서 아쉬운 결과이긴 해도 이 공방전 자체는 수긍할만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수순은 그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양수복이 연이은 후속타들을 가볍게 빗겨내는 데 그치지 않고 슬쩍 손가락을 찔러 오자 권왕은 당황했다. 그 단순한 반격에 대응하기가 만만치 않음을 직감한 탓이었다. 너무 예리해서가 아니라 빈틈이 너무 많아서였다.
찰나지간 여섯 개의 응수를 떠올린 권왕은 그 중 어느 것도 실행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는 우를 범했다. 그리고 형세는 대번에 역전되었다.
양수복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스스로 일으킨 변화이면서도 남이 만들어 준 것처럼 낯설었다. 그의 기초적인 공격수들에 쩔쩔매며 연신 퇴보를 밟는 권왕의 태도도 의아했다. 어째서 역습의 기회를 번번이 놓치고 방어에 급급한 걸까.
일시지간 권왕이 장난을 치는 건 아닌지 헷갈렸던 양수복은 곧바로 사태의 진상을 깨달았다.
진일보!
그는 권왕과 치열한 난투극을 벌이던 도중 한 걸음 나아간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보가 아니라 반의반 치가량 상승한 것이지만 실전에서 그 차이는 컸다. 양수복은 권왕의 수들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고 그래서 적시에 적절한 응수가 가능했다. 반면 권왕은 그의 의도를 정확히 짐작하지 못해 대처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봄에 양산을 내려온 이후 권왕을 포함한 강자들과 여러 차례 격전을 치렀지만 그것들은 그저 경험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했다. 넉 달 가까운 시간 내내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이어 닥치는 바람에 차분히 지난 승부들을 복기하며 무학을 궁구할 여유가 없었던 탓이었다. 정인과의 인연으로 인해 심공에만 몰두했더랬다.
그런데 정신없이 싸우던 중에, 더욱이 열세를 면치 못하다 비세에 처했을 때 상당한 기간의 적공 후에야 기대할 법한 성취를 얻은 것이었다. 양수복은 기쁘기보다는 어리둥절한 느낌이었다.
권왕의 숨소리가 방사를 치르는 사내처럼 거칠어졌다. 몸놀림도 한층 격렬해졌다. 양수복은 그가 순순히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막다른 궁지에 몰리면 사전 약조를 어기고 공력을 동원할 우려가 컸다. 그리되어서는 곤란했다.
양수복은 전략적인 판단에 따라 권왕에게 숨통을 틔워주었다. 권왕은 흐트러졌던 전열을 가다듬는 대신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게냐?”
“아닙니다.”
“그럼 뭐냐? 처음부터 나를 가지고 놀았던 게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시치미 떼지 마라. 내, 너를 그렇게 보지 않았거늘……, 갈(喝)!”
권왕은 역정을 내다 말고 호통을 쳤다. 그의 주먹에 형성된 황금빛 강기가 포탄처럼 양수복을 향해 날아갔다.
권왕의 권강(拳剛)은 양수복을 겨냥한 게 아니었다. 양수복의 후방에서 날아든 칼바람이 목표물이었다.
펑!
폭음과 함께 양수복을 덮쳐오던 도풍이 박살 났다.
“어떤 놈이냐?”
권왕의 질문에 응답한 이는 사내가 아니라 여자였다.
“나는 도천의 천주에요. 당신과 싸우려는 게 아니에요, 권왕. 우리 같이 저 악귀를…….”
“닥쳐라, 돼지. 내 공언을 공갈로 봤냐? 나와 암왕의 대결을 방해하거나 끼어드는 자는 적으로 간주한다지 않았더냐?”
“돼지라니? 죽여 버릴 테다, 늙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