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목 차
25. 규동
26. 예약 전쟁
27. 스타 셰프 김만석
28. 푸드 X 파일
29. 유산슬
30. 굴소스
31. MSG
32. 법무 법인 태광
33. 수임료는 그랜절로
34. 소울 푸드
35. 돈가스
36. 10만 원
37. 마즐랭?
38. 오리 콩피
39. 언양식 불고기
40. 치킨
41. 불고기
42. 주방 보조
43. 재건축
44. 불법 사채
45. 몸의 대화
46. 초밥
25. 규동
* * *
“갑자기?”
“아니이. 그런 거 말고. 이리 와 봐. 빨리.”
남자가 윤소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윤소희의 시선에 비친 남자의 표정이 다이나믹하게 변해 갔다.
의문, 놀람, 환희.
“어? 어! 우와!”
윤소희가 환하게 웃었다.
“작아졌지.”
“어! 진짜! 진짜 작아졌어! 이번 항암제 효과가 있나 봐!”
“응! 그제부터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렇게 됐어.”
“반도 넘게 작아졌는데?”
“그러니까! 내가 오빠 오면 말해 주려고 전화로는 말 안 했음.”
“그런 걸 왜 말을 안 해!”
“오늘 직접 확인하고 더 신나 하라고?”
남자가 윤소희를 와락 껴안았다.
껴안으려 달려드는 자세는 와락 이었지만.
정작 윤소희의 몸에 닿을 땐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신나지. 그럼 신나지. 너무 신나지!”
“응! 이 암 덩어리 빨리 더 줄어들어라.”
“그래! 빨리 완전히 없어져 버려라!”
“그럼 이제 세상에서 제일 예쁜 유방암 환자를 위해 다진 고기 규동을 내놓으실까? 우리 요섹남 박현석 씨?”
“알았어! 금방 해 올게!”
입이 귀에 걸린 박현석이 요리 재료들을 한 품에 끌어안고 주방으로 향했다.
뒤통수와 등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얼마나 신나 있는지 느껴질 정도.
박현석이 요리를 시작하고.
식탁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윤소희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오빠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오빠 없었으면 난 못 견뎠을 거야. 어쩌면 벌써 죽…….”
“응? 뭐라고?”
윤소희가 다시 애써 목소리에 힘을 밀어 넣었다.
“아니야. 얼른 규동이나 갖고 와.”
“10분만 기다려!”
잠시 후.
박현석이 다진 고기 규동 두 그릇을 가져왔다.
하얀 밥 위에 양파와 함께 조린 다진 소고기가 놓여 있다.
그 위에는 온센타마고(おんせんたまご, 온천 달걀. 일본식 달걀 반숙 요리)가 하나 올라가 있다.
꽤 뛰어난 솜씨.
“오, 역시 요섹남.”
“먹어 봐.”
“응. 이건 먹을 수 있겠지?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먹어야지. 그래야 힘내서 항암 치료도 마저 받고 암 새끼도 몰아내지.”
“그래. 먹고 완전히 몰아내자.”
윤소희가 규동을 한 숟가락 떴다.
“잘 먹겠습니다아.”
조심스럽게 입 안에 다진 고기 규동을 넣었다.
“윽!”
“왜! 맛없어?”
윤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 최악.”
“최악?”
겨우겨우 규동을 삼킨 윤소희가 혀를 쭉 내밀었다.
“오빠.”
“응?”
“그냥 고기가 종이 씹는 맛이라면, 이건 입 안에 모래가 돌아다니는 맛이야.”
“아…….”
잔뜩 실망한 박현석의 표정.
눈빛엔 곤란함이 가득하다.
풉.
윤소희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웃어?”
이젠 아예 고개를 젖히고 까르르 웃는다.
“웃기잖아. 상자 씹는 거 같아서 고기를 못 먹겠다고 했더니 모래알 고기를 만들어 왔어.”
“미안.”
“아니야, 고마워 오빠. 오빠 아니면 누가 날 이렇게 생각해 주겠어. 내가 이거 다 먹을 자신은 없고, 반 정도는 어떻게든 먹어 볼게. 모래알 덮밥. 하하하. 모래알 덮밥이라니. 내 남자친구가 나한테 모래알을 먹였어.”
즐거워 보이는 윤소희의 반응에 그제야 박현석의 표정도 풀렸다.
“그래서, 상자가 나아 모래알이 나아?”
“솔직히?”
박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 다진 고기보단 차라리 그냥 고기가 나아. 하하하.”
“하하하. 내가 또 쓸모없는 짓을 했네.”
“아니야, 오빠. 고마워. 밥 먹자. 내 것 반 떠가. 오빠 더 먹어. 난 어떻게든 반이라도 먹어 볼게.”
“그래. 반이 어디야. 이거 먹고 또 어떻게 단백질을 먹을지 회의하자.”
“응. 내가 진짜 오빠 있어서 웃는다. 너무 고마워. 사랑해.”
* * *
조중석은 레스토랑에 방문한 윤소희의 머리가 짧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항암 치료 때문에 삭발했다가 저만큼 자란 것이겠지.
꽤 자란 걸 보니 지금은 좀 괜찮아진 모양이다.
어렸을 때 친척 중에 암 환자가 있었기 때문에 대충은 알 수 있었다.
광어튀김과 전복구이가 나가고.
조중석은 고민에 빠졌다.
‘규동을 어떻게 해야 하나…….’
원래는 얇게 썬 소고기로 빠르게 조리하는 요리.
그런데.
기억 속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다.
단편적인 기억이었지만.
힘든 상황 속에서도 윤소희는 박현석을 믿고 의지하고 박현석은 윤소희의 치료를 위해 헌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조중석이 느낄 수 있는 건 윤소희의 오감(五感)뿐이었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땐 한창 항암 중이라 남자친구의 다진 고기 규동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을 테니. 오늘 다진 고기 규동을 재연해 주는 게 나으려나, 아니면 그냥 준비한 고기를 쓰는 게 나으려나.’
기억이 밀려 들어온 사람의 감각을 그대로 느끼는 것뿐이기 때문에.
조중석 역시 박현석의 규동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윤소희가 느끼는 감각을 똑같이 느꼈기 때문이다.
정말 입 안에서 쓰디쓴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듯한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하지만 잘 조려진 고기의 상태나 음식의 담음새 등에서 박현석이라는 사람의 요리 실력을 대충 알 수 있었다.
취미로 하는 것 치고 꽤 높은 수준.
윤소희가 박현석을 요섹남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평소에도 요리를 많이 해 준 모양이다.
마침 냉장고에는 다진 소고기가 있다.
기름이 많은 부위와 적은 부위를 따로 구매한 다음 직접 적절한 비율로 섞어 놓은 다진 고기다.
내일 예약 손님에게 만들어 줄 미트볼을 미리 재워 두기 위해 사다 놓은 식재료.
‘다진 고기는 다시 사 오면 되지.’
남자친구의 규동을 재연해 그때 느끼지 못했던 다진 고기 규동의 제대로 된 맛을 느껴 보게 하고 싶긴 하지만.
마음대로 이상한 재료로 규동을 만들어 메인 메뉴라고 내놓을 수는 없다.
동파육에 조린 알배추를 곁들이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
조중석의 선택에 따라 주재료가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혹시 모르니 물어나 보자.’
광어튀김과 전복구이 서빙이 끝난 후.
아일랜드 앞에 가서 선 조중석이 물었다.
“메인 메뉴를 위한 소고기가 세 종류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방이 있어 고소한 등심과, 담백한 목심. 그리고 살코기와 지방을 적절한 비율로 섞은 다진 고기가 있습니다. 어떤 걸로 해 드릴까요?”
앞의 두 선택지는 원래 준비해 둔 것이었고.
마지막 선택지는 방금 끼워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