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야, 그만하세요
4권
옥루인취 장편소설
제89화
고천주는 말과 동시에 그를 몇 바퀴 돌렸다. 마치 거대한 인형을 가지고 놀듯이 말이다. 고천주에게 꼼짝없이 붙들린 엄조는 머리가 어지러워 낯빛이 하얗게 질리고 속이 뒤집혀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멋스럽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두려움에 달달 떨고 있는 겁쟁이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엄조는 기가 찼다. 한 떨기의 가녀인 꽃인 줄 알았던 미인은 알고 보니 포악한 패왕화였다.
‘무슨 여인이 힘이 이렇게 세? 괴물이야?’
엄조가 서둘러 소리를 질렀다.
“멈춰라! 다들 멈추거라!”
엄조의 다급한 목소리에 시종들이 흠칫 놀라더니 몽둥이를 내려놓고 엄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제 눈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칠 척이나 되는 거대한 몸집의 사내가 가녀린 여인의 손에 들려 팽이처럼 뺑뺑 돌려지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너무도 충격적인 장면이라 시종들은 하나같이 얼이 빠지고 말았다.
‘내가 왜 여기서 기예 공연을 보고 있는 거지?’
모두가 하던 짓을 멈추자 고천주가 관사에게 말했다.
“저들을 모조리 포박해서 관부로 끌고 가거라. 가서 저들이 권세를 등에 업고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며 백성의 장사를 방해했다고 전해라.”
“예!”
관사는 주변의 모두가 들을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응하고는 점원에게 명해 엄조의 시종들을 모조리 포박하게 했다. 엄조가 꼼짝없이 고천주의 머리 위에 들려진 탓에 그의 시종들도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전부 단단히 포박되었다.
고천주는 엄조를 관사의 발치에 던져버리고는 청아한 목소리로 분부했다.
“엄국공부의 막내 공자도 함께 포박해서 관부로 끌고 가거라.”
“예!”
관사는 호기롭게 답하고는 밧줄을 가져와 직접 엄조를 묶기 시작했다. 한편, 고천주에게 던져진 엄조는 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그는 너무 아파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아직 채 숨을 고르지도 못했는데 한순간에 밧줄에 꽁꽁 묶인 엄조는 화가 나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가 거리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난 엄국공부의 막내 공자이니라. 한데 감히 날 묶어? 다들 죽고 싶은 것이냐?”
고천주가 엄조를 힐끔 보더니 손을 툭툭 털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차에 던져서 관부로 데려가거라.”
“예!”
관사가 손짓하자 점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와 엄조와 그의 시종들을 마차에 던져버렸다. 자그마한 공간에 한데 포개진 시종들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나메 엄조는 배려해서 가장 마지막에 던졌다.
엄조는 당장 느껴지는 통각도 통각이거니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뭐라고 욕지기를 내뱉으려는데, 순간 신발 한 짝이 날아와 그의 입을 틀어 막았다. 붉게 충혈 된 그의 두 눈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점포의 점원들이 마차를 끌고 곧장 관부로 향했다. 점포 앞은 다시 조용해졌다. 고천우가 서둘러 놀란 손님들을 진정시키자 고천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들에게 공짜로 얼굴을 씻어드리겠다고 하세요.”
말로만 하는 사과보다 물질적 위안이 무엇보다 더 효과가 있는 법이었다. 고천우는 잠시 고민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바로 가서 할게.”
고천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예 실력을 갖춘 점원을 뽑으세요. 의외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 쓸모가 있을 거예요.”
고천우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앞으로 누가 또 점포에 와서 소란을 피우면, 아예 다리를 분질러버릴 거야.”
고씨 집안에는 무예 실력을 갖춘 사람이 넘쳐났다. 고천주가 작게 웃었다. 그녀는 고천우가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었다. 일을 신속하게 처리한 탓에 손님들도 놀란 가슴을 빨리 진정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공짜로 얼굴까지 씻어준다고 하자 모두 함박웃음을 지으며 방금 전 소란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공짜 우대를 받으니 그들로선 이득이었다.
돈이 있다고 다 얼굴을 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미리 예약하고 대기해야 했기에 얼굴을 한 번 씻으려면 품을 꽤 들여야 했다.
고천주는 개진해야 할 사항을 다 쓴 뒤 장부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회계 선생에게 도표를 설계해주었다. 도표를 살펴본 회계 선생은 순간 머리가 맑아져 활짝 웃었다. 회계 선생은 앞으로 누가 고씨 집안은 산적 출신에 일자무식이고 야만적이라고 떠들어대면, 면전에 이 도표를 던져줄 생각이었다.
고천주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아주 실용적인 도표를 설계해냈다. 허구한 날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대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탁상공론만 벌이는 선비들보다 고천주가 백배는 나았다.
일을 마친 그녀가 점포를 떠날 채비를 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 한 대가 달려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잇달아 휘장이 열리더니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형님, 바로 이곳입니다. 제가 하마터면 이 점포에서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저를 대신해 복수 좀 해주십시오!”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엄조가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아직도 가시지 않은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뒤이어 군장 차림을 한 엄광이 내려왔다. 오늘 막 경성으로 돌아온지라, 엄광은 부로 가는 길에 마침 포박당한 채 관부의 문 앞에 던져진 엄조를 발견했다.
엄광의 이복동생인 엄조는 엄국공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악행이란 악행은 죄다 저지르고 다녔다. 그런데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엄조가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굴욕을 당하긴 처음인지라 엄광은 살짝 호기심이 동했다. 해서 엄조가 울며불며 부탁할 때 번거로움도 마다하고 함께 점포까지 와준 것이다. 엄조를 포박해 관부에 던져버린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기에.
그런데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곤 갑자기 껄껄 웃어대기 시작했다.
‘이거 참, 경성에서 누가 감히 엄국공부의 막내 공자를 포박해서 관부로 끌고 갔나했더니 신의였군.’
엄광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천주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렸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고천주가 팔짱을 끼고 엄광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전혀 당황해하는 기색 없이 의기양양한 엄조를 향해 서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막내 공자, 뒷배를 데리고 오신 모양입니다.”
웃으니 더 매혹적으로 보이는 고천주의 모습에 엄조는 화가 나기도 하고 마음이 근질거리기도 했다.
‘네 이년, 두고 봐. 점포를 박살 내고 나면 네년을 홀딱 벗겨 내 앞에 비참하게 무릎 꿇릴 것이다. 그때 가서도 어디 지금처럼 오만방자하게 굴 수 있는지 지켜볼 것이야.’
엄조가 옆에 있는 엄광을 쳐다보며 이를 갈며 말했다.
“큰형님, 바로 저년입니다. 저를 대신해 혼내주십시오!”
엄조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엄광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냐? 하면 저 여인이 너를 어떻게 괴롭혔는지 자세히 설명해 보아라.”
엄조는 의아했다.
‘바로 때려눕혀 무릎을 꿇리면 될 것을 왜 쓸데없이 일일이 묻는 거지?’
하지만 큰형님인 엄광이 물으니 답을 해야만 했다. 엄조가 다시 생각해도 분한 듯 어금니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저년이 저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세차기 돌린 다음 바닥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점원들에게 저를 포박해 관부로 끌고 가라고 명했지요. 이는 분명 우리 엄국공부에 대한 모욕입니다! 한데 어찌 가만 있을 수 있겠습니다. 큰형님! 반드시 저년을 엄벌해 엄국공부의 존엄을 되찾아야 합니다!”
엄조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채찍이 바람을 가르고 그를 향해 날아왔다. 그리고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아악!”
곧이어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을 지른 이는 고천주가 아니라 엄조였다. 느닷없이 엄광이 휘두른 말채찍에 맞은 엄조는 너무 아파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엄광을 쳐다보았다. 그는 엄광이 채찍을 잘못 휘두른 줄 알았다.
엄광이 그를 내려다보며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이는 계집 하나 이기지 못한 데 대한 벌이다. 너야말로 엄국공부의 가장 큰 수치이니라. 두 번째 채찍은 네가 엄국공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악행을 저지른 데 대한 벌이다. 세 번째 채찍은 사내가 될 자격이 없고, 엄국공부의 사내가 될 자격은 더더욱 없는 네게 내리는 벌이다. 엄국공부의 사내는 여인과 약자를 지켜주면 지켜주었지, 종래도 괴롭힌 적이 없느니라. 한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엄국공부를 등에 업고 여인과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냐?”
엄광은 말이 끝남과 함께 엄조를 향해 두 번의 채찍을 더 휘둘렀다. 엄조는 살갗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너무 아파 하마터면 혼절할 뻔했다. 엄조는 예기치 못한 사태에 그저 비명만 내질렀다. 그가 또다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넋이 나간 표정으로 엄광을 쳐다보았다.
평소 엄조가 가장 존경하는 큰형님인 엄광이 그를 때렸다. 게다가 그에게 엄국공부의 사내가 될 자격이 없다고도 했다. 가슴에 비수처럼 내리꽂힌 엄광의 말은 채찍에 맞은 것보다 더 아프게 느껴졌다. 엄조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엄광은 채찍을 거두고 뒤에 있는 측근 시종에게 분부했다.
“막내를 집으로 데려가 잘 보살피거라.”
“예.”
명을 받은 시종이 손짓하자 하인들이 달려와 엄조를 데려갔다. 순식간에 제가 굳건히 믿어온 세상이 무너진 엄조는 멍하니 그대로 하인들의 손에 들려갔다. 엄광이 고천주를 보며 사과했다.
“막냇동생이 철이 없어 고 사소저께 무례를 범했소.”
엄광은 고천주를 초왕비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고천주를 제 사람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고천주가 입꼬리만 살짝 당겨 올리며 대꾸했다.
“대의가 바르고 정의감이 넘치는 엄 대공자야말로 만백성의 본보기십니다.”
고천주는 영혼 없이 한마디하고는 뒤돌아 가버렸다. 엄광은 늘씬한 그녀의 뒷모습과 눈앞의 점포를 번갈아 보더니 서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초왕부가 사소저를 박대하는 것이오? 어찌 사소저께서 얼굴을 드러내고 밖에서 돈을 벌고 있는 게요?”
고천주가 엄광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나 엄광은 계속해서 웃으며 말했다.
“자고로 집안에 새사람이 들어오면 옛사람의 서글픔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했소. 쉽게 딴마음을 품고 오래된 것에 싫증내는 건 사내의 본성이오. 게다가 초왕야는 연모하는 여인을 측비로 맞이하지 않았소? 내 사소저께서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도와줄 터이니, 내게 오시오.”
고천주는 발걸음을 멈추고 엄광을 뒤돌아보았다. 그녀가 언짢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어떻게 자유를 얻게 해주실 거죠?”
엄광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사소저가 걱정할 일이 아이오. 그대는 내게 올지 말지만 정하면 되오.”
고천주가 예쁜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왕야는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지위와 권세도 갖추고 있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제가 왜 장군에게 가겠습니까?”
고천주는 말을 마치고 미련 없이 홱 가버렸다. 엄광의 호탕한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고천주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이를 갈았다.
‘잘생기고 지위와 권세를 갖춰? 기반도 없는 왕야에게 권세가 있긴 뭐가 있어? 그리고 잘생긴 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어. 군묵침이 아무리 잘생겨도 그에게 왕야의 신분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란 말이야.’
엄광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확신에 찬 냉소를 지었다. 그는 고천주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마차에 몰랐다. 점포에서 나온 고천주는 곧장 인심당으로 향했다.
인심당은 요즘 장사가 아주 잘 되었다. 찾아온 환자가 너무 많아 다 받지도 못할 정도였다. 처음엔 우왕좌왕했지만 고천주의 제안에 따라 환자가 접수를 해야 진찰을 받을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자 모든 게 질서정연해졌다.
물론 응급 환자를 위한 급진 통로는 남겨두었다. 오늘 응급 환자 한 명을 받았는데, 환자는 구토와 설사를 동반하며 거의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척 의원은 각종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환자의 구토는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쩔 도리가 없어 사람을 시켜 고천주를 불러오려는데 마침 고천주가 제 발로 먼저 찾아온 게 아니겠는가?
척 의원은 서둘러 고천주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천주가 아실에 들어서자 구토를 하고 있는 한 여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 그녀는 이미 너무 많이 토한 탓에 더 이상 게워낼 것이 없어 위액만 겨우 토해내고 있었다.
척 의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언가를 잘못 드신 듯한데, 약을 먹였지만 여전히 구토가 멈추지 않소. 선생께서 낭자를 한 번 진맥해보시오.”
고천주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아 여인의 맥을 짚어보았다. 여인은 경계심이 강했다. 그녀는 번쩍 고개를 들어 고천주를 힐끔 보더니 재빠르게 고천주에게 붙잡힌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기력이 없었던 탓에 손을 뺄 수 없었다.
고천주는 손끝으로 그녀의 맥을 꾹 짚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십시오. 저승 문턱에 한쪽 발을 들여놓은 판국에, 그리 날카롭게 경계를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고천주의 말에 여인은 흠칫하더니 또다시 헛구역질했다. 하지만 이미 탈수가 올 때까지 토한지라 더 이상 게워낼 것이 없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여인은 남아 있는 의지력으로 희미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상태였다.
맞는 말이었다. 이미 저승 문턱에 다다른 그녀인데, 상대를 경계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여인은 긴장을 풀고 자리에 누워 계속해서 헛구역질했다. 고천주는 여인의 모습이 무척 가엾게 느껴졌다.
진맥을 끝낸 고천주가 여인의 몸을 한 번 찬찬히 살펴보더니 곧바로 처방전 하나를 써서 척 의원에게 탕약을 지어오게 했다. 그러고는 은침을 꺼내 여인에게 침 몇 대를 놓았다. 그러자 여인의 헛구역질이 드디어 멈췄다.
여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천주를 쳐다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무슨 독에 중독되었습니까?”
고천주는 여인에게 침 한 대를 더 놓고는 덤덤하게 답했다.
“낭자께선 중독된 게 아니라 물갈이 때문에 그런 겁니다.”
고천주의 말에 여인이 더욱 세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물갈이라고요? 그럴 리가요?”
천하를 집 삼아 떠돌아다니는 그녀는 여태까지 단 한 번 물갈이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맡겨진 임무가 있는지라 휴식을 취할 수도 없었다. 여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전 휴식할 시간이 없습니다. 제게 독한 약을 처방해주십시오.”
여인은 한시라도 빨리 몸을 회복해야 했다. 고천주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커다란 눈망울에 오뚝한 코를 가진 여인은 이목구비가 또렷했는데, 특히 푸른 눈동자가 아주 아름다웠다. 고천주는 예쁜 여인에게는 유난히 인내심이 샘솟았다.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독한 약을 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낭자는 기가 많이 약해진 탓에 독한 약을 쓰면 몸이 받아내지 못합니다. 때문에 휴식을 취하며 천천히 추슬러야 합니다.”
여인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찡그리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답했다.
“알겠습니다.”
여인이 알겠다고 답하자 고천주도 더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고천주는 여인의 병을 치료해줄 수 있지만, 그녀의 목숨까지 구해줄 수는 없었다. 여인이 기어코 말을 듣지 않고 죽기를 자처한다면 고천주도 달리 방도가 없기에.
제90화
인심당에서 나오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곧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았다. 시간을 절약하고자 고천주는 큰 길이 아닌 지름길을 택했다. 굽이굽이 작은 골목을 지나가는 것도 꽤 재미가 있었다.
고천주는 느긋하게 말을 몰며 해가 지는 풍경을 감상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다름 아닌 소상낙이었다. 골목을 혼자 걸어가던 소상낙은 갑자기 뒤돌아 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너울 모자를 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수상쩍었다. 고천주는 소상낙이 들어간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허름한 저택이었다.
‘웬일이지? 혹 왕재수 왕야가 아예 새살림을 차리려고 소상낙에게 새 집을 주었나?’
호기심이 동한 고천주는 말에서 내려 저택의 지붕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갔다. 안에서 소상낙이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얼마 후 방안의 장면을 목격한 고천주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지붕에서 떨어질 뻔했다. 벌건 대낮에 두 남녀가 딱 붙어 있는 게 아니겠는가?
‘왕부에서 하면 될 걸 왜 굳이 이 궁벽한 곳까지 와서 저러는 거야? 으스스 하면 더 느낌 있나?’
육욕에 미친 듯, 한데 뒤엉켜있는 두 사람을 보자 고천주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과 동시에 짜증과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가 막 뒤돌아 가려는데, 소상낙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사내의 옆모습이 드러났다.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고천주는 경악해서 사정없이 눈 둘 곳을 찾았다. 그녀는 하마터면 또다시 지붕에서 떨어질 뻔했다. 고천주는 제가 잘못 본 줄 알고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찬찬히 보았다. 사내는 군묵침이 아니라 대황자가 분명했다.
‘소상낙이 왕야의 측비가 되어서도 대황자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니. 어젯밤 왕야와 초야를 치러놓고는 오늘 대황자와 또 몸을 섞은 거야? 쯧쯧쯧, 시간 관리의 대가 납셨네.’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 그 모습을 한참 감상하고 있던 고천주는 두 사람이 갈수록 무아지경에 빠져들자 문득 이 해괴한 장면을 보고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고천주가 조용히 지붕에서 내려와 말을 타고 자리를 떴다.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소상낙이 뒤에서 저런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걸 왕야가 알면 기분이 어떨까?’
대황자든 이황자든, 아니면 칠황자든 모두 군묵침과는 숙적이었다. 왕부의 측비가 된 소상낙은 누가 뭐래도 이제는 왕부의 사람이었다. 때문에 소상낙이 대황자와 사통을 하는 건 무척이나 부적절한 일이었다.
‘나는 초왕비이니, 혹여 왕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도 따라서 무사하지 못할 터.’
군묵침과 고천주는 한 배를 탄 사이였기에 어찌 되었든 군묵침에게 귀띔은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왕부로 돌아온 고천주가 곧장 서재로 향했다. 그런데 군묵침은 서재에 없었다. 진숙에게 물었더니 일을 처리하러 외출했고 이틀 안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했다. 잠시 고민하던 고천주가 또 물었다.
“소 측비는 어디 있느냐?”
진숙이 공손하게 답했다.
“측비께선 볼일이 있으시다며 소부에 가셨습니다. 왕비, 혹 측비께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소인이 사람을 시켜 측비를 불러올까요?”
고천주는 손을 흔들었다.
“그럴 필요 없다.”
굳이 간통 현장까지 잡을 생각은 없었다. 군묵침이 돌아오면 그에게 오늘 일을 귀띔해주는 것만으로도 고천주는 제 본분을 다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성진원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뒤 또다시 마당에서 약초를 돌보기 시작했다. 달이 두둥실 떠오르고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해진 뒤에야 목욕간으로 들어가 씻고 피부 관리와 안마를 받았다.
고천주의 가르침으로 금이의 안마 실력은 날이 갈수록 늘었다. 고천주는 온몸에 힘을 풀고 긴 의자에 누워 수준급 실력이 된 금이의 안마를 받으며 꾸벅꾸벅 졸았다. 그때였다. 별안간 머리 위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찾았다고?”
고천주가 번쩍 눈을 떴다. 그녀의 눈앞에 안마를 해주던 금이 대신 덩치가 산만 한 군묵침이 서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림자가 드리워 군묵침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엄청났다.
고천주는 순간 정신이 번쩍 뜨였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 앉아 경악하며 말했다.
“왕야가 왜 이곳에 계세요?”
‘일을 처리하러 외출했다며?’
고천주는 얇은 비단 장의만 걸치고 있었다. 그녀가 옷을 제대로 여미지 않은 상태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장의가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내렸다. 군묵침은 눈앞의 새하얀 살갗을 본 순간 놀라 흠칫하더니 재빨리 뒤돌아섰다. 잘생긴 그의 얼굴이 이내 붉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