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야, 그만하세요
6권
옥루인취 장편소설
제157화
소상낙은 홍차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곱게 치장한 그녀는 허리띠를 바싹 졸라맸고 높게 빗어 올린 머리에는 비녀 하나를 꽂았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선녀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성 공공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단지 홍차를 준비한 것 치고는 치장이 다소 과하지 않나? 설마하니 폐하를 유혹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가 소상낙을 힐끔 보더니 애써 찝찝한 마음을 거두고 시선을 내리깐 채 공손히 물러갔다. 사뿐사뿐 앞으로 걸어가던 소상낙은 번쩍이는 무언가가 신경 쓰였다. 살짝 고개를 들어보니 벽에 대도와 창칼, 도끼 같은 무기가 걸려있는 게 아니겠는가? 위엄을 내뿜는 무기를 보고 깜짝 놀란 소상낙은 하마터면 비틀거리다 넘어질 뻔했다.
금색 용포를 입고 서안 뒤에 앉아 있는 황제가 없었다면 소상낙은 고문실에라도 들어온 줄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계속해서 홍차를 들고 황제를 향해 사뿐사뿐 걸어갔다.
황제는 벽에 걸려있는 붉은 술이 달린 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어떤 회상에 젖은 모습이었다. 늘 엄숙하고 살기가 어렸던 황제의 얼굴에 옅고 부드러운 빛이 내려앉았다.
그 해 황실 사냥터에서 황제는 가장 포악한 호랑이 한 마리를 추격했다. 연신 활을 쏴서 맹호가 잡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죽어가던 맹호가 갑자기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더니 그를 향해 덮쳐왔다.
활을 다 써버린 황제는 맹호의 공격을 막아 낼 방법이 없었다. 다급히 말을 타고 도망가려는 순간, 맹호가 한 발로 그가 타고 있는 말을 넘어뜨리고 다른 한 발은 그의 숨통을 향해 뻗어갔다.
순간 눈이 커다래진 황제는 결국 맹호의 발톱에 긁혀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붉은 술이 달린 장창이 날아와 정확하게 맹호의 숨통에 꽂혔고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튕겼다.
그런 와중에 차갑고도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상대의 눈빛은 맹수처럼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그 모습은 마치 천군만마를 거느리고 나타난 장수 같았다. 황제는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아마 그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폐하, 차를 대령했사옵니다….”
소상낙의 달콤한 목소리가 황제의 회상을 중단시켰다. 정신이 돌아온 황제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소상낙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단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한번 작게 말했다.
“폐하, 차를 대령했사옵니다….”
소상낙은 공손한 자세로 황제 앞에 조심스럽게 홍차를 내려놓았다.
“그래.”
황제는 짧게 대답하고 대수롭지 않게 찻잔을 들려고 손을 뻗었다. 한데 그만 소상낙의 손과 닿고 말았다. 순간 역겨운 감정이 치밀어 서늘한 눈빛으로 소상낙을 위아래로 훑었다. 소상낙은 겁먹은 토끼처럼 재빨리 손을 뺐다. 수줍어하는 그녀의 모습은 꼭 청초한 벚꽃 같았다.
소상낙은 언제나 사내의 마음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해 왔다. 그녀는 수줍어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모습을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 지금까지 이러한 교태에 넘어오지 않은 사내는 없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아마 지금쯤 폐하께선 나를 품에 끌어안고 싶어 안달이 났을 테지.’
하지만 황제는 소상낙과 대황자가 뒤엉켜있던 가장 추한 모습을 보았기에 그녀에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소상낙이 용천궁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것도 소 태부가 밤새 무릎을 꿇고 애원한 덕분이었다. 더불어 그녀가 쓰디쓴 장망 도사의 금강단을 먹기 좋게 만든 것도 조금의 보탬은 됐을 것이다.
황제에겐 차고 넘치는 것이 여인이었다. 긴 세월 동안 이미 여인의 교태란 교태는 다 본 황제가 소상낙의 뻔한 유혹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가 대놓고 소상낙을 경멸하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사약이니 차와 탕약만 올리면 된다. 짐의 시중까지 들 필요 없다. 짐의 시중을 드는 이들은 전부 깨끗한 여인들이라 넌 자격이 없느니라.”
황제의 말에 소상낙의 얼굴에 서렸던 미소가 순간 굳어버렸다. 아름답게 피어오른 꽃송이가 우박을 맞아 산산조각이 난 것만 같았다. 소상낙은 황제를 유혹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 그녀의 작은 얼굴이 수치심으로 새빨개졌다.
‘내가 왜 더럽혀졌는데? 다 당신 아들놈 때문이잖아!’
그녀는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화가 치밀었지만 황제 앞이라 겉으로는 내색할 수 없었다. 소상낙이 공손하게 말했다.
“소, 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억울합니다, 폐하!”
더는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황제가 파리를 내쫓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물러가거라. 이곳은 네가 머무를 곳이 아니다.”
“예.”
소상낙은 공손히 응하면서 팔소매 속에서 손가락이 으스러질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게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밖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갔다. 그러면서 속으로 늙은 황제가 빨리 차를 마시기를 기도했다.
소상낙이 문 앞까지 다다른 순간, 뒤에서 잔뜩 잠긴 목소리가 들여왔다.
“옥아, 옥아, 이리 오너라….”
깜짝 놀란 소상낙은 긴장되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성공인가?’
소상낙이 고개를 홱 돌렸다. 방금까지도 엄숙하고 서늘했던 황제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황제가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소상낙은 드디어 약효가 돈다는 생각에 황제를 향해 활짝 미소 지었다.
그녀가 잔뜩 애교 섞인 목소리로 황제를 부르려는데, 어디선가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나타나 소상낙보다 먼저 달콤한 목소리로 황제를 불렀다.
“폐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용 귀비였다. 그녀는 허리를 비뚤거리며 나비처럼 황제를 향해 덮쳐갔다. 황제는 두 팔을 벌려 단번에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황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옥아, 짐의 옥아….”
용 귀비는 한 손으로 황제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다른 한 손은 허리를 잡은 후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소상낙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소상낙은 충격과 분노로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녀는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어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용 귀비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소 사약, 물러가지 않고 무얼 하느냐? 나와 폐하의 정사를 지켜보기라도 할 심산이냐?”
소상낙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시선을 늘어뜨렸다. 그녀가 이를 악문 채 공손하게 말했다.
“소인이 어찌 감히 그리할 수 있겠습니까?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소상낙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겨우 참고 허리를 굽힌 채 물러갔다. 할 수만 있다면 용 귀비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뻔뻔한 늙은 계집이 감히 내 일을 망쳐? 제기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 공공은 그제야 방금 느꼈던 찝찝함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소 사약이 폐하의 승은을 입으려했구나! 초왕의 측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황자와 남몰래 더러운 짓거리를 하더니, 이제는 황제의 후궁까지 꿈꾼다고? 정녕 군씨 사내들과 한 번씩 몸을 섞을 작정인가? 쯧쯧쯧, 참으로 무서운 계집이군.’
모든 걸 눈치챈 성 공공은 소상낙이 밖으로 나서는 순간, 자연스럽게 뒤로 한 발 물러섰다. 혹여 더러운 기운이 묻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성 공공이 기함하며 벌레 보듯 저를 피하자 소상낙은 더욱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양물도 없는 환관 주제에 감히 날 혐오해?’
소상낙은 마음 같아선 성 공공을 발로 콱 차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이성으로 겨우 그런 충동을 막아냈다. 성 공공은 황제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 환관이기에. 소상낙은 화를 꾹 누르고 씩씩거리며 떠나갔다.
반면 황제는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연신 옥을 불렀다. 그는 옥을 위해 심장이라도 내놓고 싶을 정도 깊이 연모했다.
용 귀비는 달콤하게 웃으며 황제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늙은 황제가 지금 누굴 떠올리든 용 귀비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오직 아이였다. 그녀는 누구보다 간절하게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선 황후가 세상을 뜬 후 황제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늙어갔다. 어쩌면 어느 날 갑자기 승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아이가 없는 상태에서 황제가 승하한다면 그녀는 비구니가 되어 반평생 대불사 뒷산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될 것이다. 용 귀비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녀는 언제나 남들에게 받들려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을 좋아했다. 아이만 있으면 설령 황제가 늙어 죽는다고 해도 계속해서 태비(太妃)의 대접을 받으며 황궁에서 노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설령 태비에 봉해지지 못한다고 해도 아이와 함께 밖에 나가면 여전히 남 부러울 것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남녀 지정보다 영원한 부귀영화가 더 중요했다.
용 귀비는 최근 며칠 계속 황제와 합방했지만 여전히 회임 소식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태의도 불러 보았지만 걱정과는 달리는 그녀는 회임이 잘 되는 체질이라고 했다. 한데 이상하게 아무리 합방을 해도 회임이 되지 않았다.
용 귀비는 계속해서 몸조리를 하며 황제와 한 번이라도 더 몸을 섞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기회가 제 발로 찾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무더운 날씨 탓에 그녀는 어화원에서 산책을 했다. 한데 한 공공이 그녀에게 몰래 다가와 지금 바로 용천궁에 가보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 말에 용 귀비는 어쩌면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큰 기대를 안고 부랴부랴 용천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소상낙이 황제의 승은을 입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니겠는가? 해서 소상낙이 마련한 기회를 홀랑 가로챈 것이다.
‘더러운 년이 감히 폐하의 후궁을 꿈꾸다니. 낯짝도 두껍지!’
용 귀비는 내쫓긴 소상낙을 떠올리며 속으로 침을 탁 뱉었다. 하지만 회임을 위해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황제의 얼굴을 잡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끊임없이 황제를 불렀다.
‘아가야, 제발 이 어미에게 와다오. 내 여생의 행복은 네게 달렸단다.’
***
초왕부.
궁에서 온 소식을 전해 받은 경운은 곧바로 군묵침이 있는 서재로 가서 글을 쓰고 있는 그에게 작게 고했다.
“용 귀비께서 기회를 가로채셔서 지금 용천궁에 계신답니다.”
군묵침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소 태부 쪽은 어찌 되었느냐? 또 다른 움직임은 없었느냐?”
경운이 작게 답했다.
“문하생들을 동원해 대자보를 쓰고 연설을 하며 백성들을 설득한 것 외에는 딱히 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갖은 애를 썼지만 시위에 동참하는 백성은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소 태부와 그의 총애를 받고 있는 몇 명 문하생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밤새 대책을 상의했다고 합니다.”
군묵침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뒤에서 몰래 더 기름을 부어라. 역당들은 지금 섬멸당하고 있어서 소문을 대대적으로 퍼뜨릴 여력이 없을 것이다. 일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건 아닌지라 능구렁이 같은 소 태부를 압박하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물론 무고한 백성들이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예.”
경운은 작게 응하고 밖에 나가 수하에게 명을 내렸다. 군묵침은 글을 쓰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분부를 마치고 물러 가려 했던 경운은 군묵침이 밖으로 나온 것을 보자 다시 조용히 돌아와 공손하게 옆에서 기다렸다.
군묵침은 아직 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컴컴한 하늘을 한참 올려다보더니 뜬금없이 경운에게 물었다.
“왕비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
왕비라는 말에 경운은 잠시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군묵침의 뜻을 알아들었다. 군묵침이 말하고 있는 왕비는 고천주라는 것을 말이다. 한데 이 야밤에 정안후부에 있는 고천주가 무얼 하고 있는지 경운이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그럼에도 제 주인의 물음에 하인으로서 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지금 암위를 시켜 살펴보고 오게 하겠습니다.”
‘이 야밤에 정안후부라니. 번거로우니 왕야께서도 분명 그만두라고 하실 거야.’
그런데 경운의 예상과 달리 군묵침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니겠는가? 경운은 할 수 없이 암위에게 고천주를 살펴보고 오라고 명했다. 명을 받은 암위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전 왕비께서 이 야밤에 주무시지 않고 무얼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도 일개 하인일 뿐이니 군묵침이 명을 내리면 불구덩이라도 뛰어 들어가야 했다. 암위는 바람 소리와 함께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제158화
잠시 후 암위는 아주 따끈따끈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고천주가 야밤에 자지 않고 사내들과 함께 후부의 연무장에서 닭구이를 먹고 있다고 했다. 닭구이의 냄새가 어찌나 향기로운지 건너편 아이들도 먹고 싶어 떼를 쓸 지경이라고 전했다.
그 말을 들은 경운은 침을 꿀꺽 삼켰다. 향기로운 냄새를 상상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마침 딱 야식을 먹을 시간이었다. 군묵침은 경운을 힐끔 보더니 덤덤하게 물었다.
“닭구이가 먹고 싶으냐?”
속마음을 들킨 경운은 놀라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재빨리 부인했다.
“아, 아닙니다!”
군묵침이 바라는 답이 있다는 듯 느긋하게 말했다.
“먹고 싶어도 괜찮다.”
경운은 잠시 멍해 있다가 뒤늦게 군묵침의 뜻을 알아채고 웃으며 말했다.
“조금 먹고 싶긴 합니다.”
군묵침이 그를 계속해서 쳐다보며 물었다.
“단지 조금 먹고 싶을 뿐이냐?”
경운은 허리를 쭉 펴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무척 먹고 싶습니다. 먹고 싶어 죽겠습니다!”
군묵침은 그제야 흡족한 듯 뒷짐을 쥐고 밖을 향해 걸어갔다.
“네가 정 그렇게 먹고 싶으면 먹게 해주마. 가자. 닭구이를 먹으러.”
경운은 한껏 장단을 맞춰주었다.
“왕야께서 소인을 이렇게도 생각해 주시니 소인은 눈물이 다 날 지경입니다.”
군묵침이 피식 웃고는 옷을 툭툭 털며 말했다.
“눈물까진 필요 없다. 그 은혜는 앞으로 날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것으로 갚거라.”
경운은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죽음을 각오하는 거로 어디 되겠습니까? 소인은 왕야를 위해서라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죽을 수 있습니다!”
“참 입에 발린 소리는 잘하는구나.”
군묵침은 피식 웃고 한 마디 던지고는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경운은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정안후부의 연무장에 사람 몇이 모여 있었다. 고천주는 신나게 닭구이를 뜯어 먹으며 고천야에게 요계(??)를 만들으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닭구이를 하도 많이 먹었더니 완전히 입에 물려버린 까닭이었다.
고천야는 한참을 낑낑거려서야 드디어 수탉에 흑을 다 발랐다. 한데 수탉이 아직 숨이 붙어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푸드덕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 버렸다. 그 바람에 고천야의 얼굴에 흙이 잔뜩 튀었다. 그는 얼굴을 닦고 숨이 넘어갈 정도로 박장대소하고 있는 고천주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누님은 거짓말쟁입니다!”
이렇게 만든 요계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기에 고천야는 고천주가 시키는 대로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닭이 몸부림을 치더니 훌쩍 날아가 버린 게 아니겠는가? 모가지를 비틀고 푸드덕거리며 날아간 수탉과 그 바람에 흙투성이가 된 고천야를 보자 고천주는 배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웃었다. 그러다가 실수로 씹고 있던 닭고기에 사례가 들리고 말았다.
“쿨럭, 쿨럭, 쿨럭….”
모닥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닭을 굽고 있던 심장경은 바로 일어나 고천주의 등을 두드려주려는데 옆에 있던 부림이 더 빨리 선수를 쳤다. 그가 손바닥으로 고천주의 등을 툭 치자 고천주가 닭고기를 툭 뱉었다. 심장경은 재빨리 그녀에게 물 한 잔을 건넸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드디어 숨이 올라온 고천주는 고천야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깔깔 웃어댔다.
“고천야, 너 정말 바보 아니야? 어떻게 닭도 못 잡아? 네가 잡을 줄 몰랐던 거면서 내 탓을 하긴.”
고천야는 분명 수탉의 모가지를 비틀어 죽였다고 생각했다. 한데 닭의 생명력이 이렇게까지 질길 줄이야. 고천주가 계속 그를 놀려대자 화가 잔뜩 난 고천야는 결국 홱 가버렸다.
그런데 뒤돌아서자마자 군묵침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게 아니겠는가?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요염했고 대장부처럼 드높은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야말로 어둠의 제왕 같은 모습이었다. 고천야는 곧바로 고천주에게 놀림받은 일을 군묵침에게 일러바쳤다.
“왕야, 누님께서 이 야밤에 잠은 안 자고 어린아이나 괴롭히고 있습니다.”
군묵침은 고천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말했다.
“내 너를 대신해 네 누이를 혼내줄 테니 걱정말거라.”
“왕야께선 정말 영명하십니다!”
고천야는 곧바로 군묵침을 향해 아부를 떨었다. 그러고는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고천주를 바라보았다. 요즘 부쩍 후부에 드나드는 군묵침 때문에 고천야는 두 사람이 화리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말았다.
고천주는 저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군묵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빛이 내려앉은 그의 얼굴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위험하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 한껏 요염한 기운을 내뿜는 그가 천천히 다가와 고천주의 앞에 멈춰 섰다. 그의 붉은 입술은 당장이라도 고천주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고천주는 저도 모르게 목덜미에서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그녀는 머릿속에 피어오른 엉뚱한 생각을 떨쳐내려고 힘껏 머리를 저었다. 그러고는 군묵침을 바라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께선 요즘 많이 한가하신가 봐요.”
‘낮에 불쑥 찾아온 것도 모자라 밤에도 찾아오다니. 정안후부가 무슨 제 안방이라도 되는 줄 아나?’
군묵침은 고천주 옆에 있는 부림을 힐끔 쳐다보고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소.”
황제는 백성들이 시위를 하고 있는 일로 애를 먹고 있는 터라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황제는 군묵침이 그 일에 관여하는 것을 꺼려했다. 때문에 군묵침은 요 며칠 정말로 꽤 한가한 나나을 보내고 있었다.
고천주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한가하면 운동을 하거나 기루라도 가시지, 이 야밤에 민가에 난입하다니요? 이건 범죄라고요!”
매정하게 쏘아붙이는 고천주의 말에 군묵침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난입이라니? 난 대문으로 떳떳하게 들어왔소.”
고천주는 눈을 흘기며 군묵침을 힐끔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