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환
3권
겨울버들잎 장편소설
54화. 다시 만난 위강
찻물을 뒤집어쓴 양 씨의 얼굴에서는 곧 두껍게 칠한 분이 물에 녹아 하얀 길을 만들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행히 차가 아주 뜨겁지 않아 화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하필 이런 격식 있는 자리에서 이게 무슨 낭패람!’
다른 부인들도 깜짝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눈만 깜빡였다.
그 가운데 낙생이 굳은 표정으로 차를 엎은 시녀를 바라보며 호통을 쳤다.
“차 한잔도 제대로 들지 못하면서, 네가 그러고도 왕부의 시녀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러자 시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얼른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원래는 낙생의 옷에만 살짝 차를 쏟을 계획이었으나 눈치가 어찌 그리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낙생이 손을 쳐내는 바람에 애꿎은 양 씨만 차를 뒤집어쓰게 된 것이었다.
뒷감당할 생각에 시녀는 절로 몸이 휘청거렸다. 이를 방관하고 선 위문은 남몰래 손수건을 쥔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시녀를 시켜 실수인 척 낙생의 옷에 차를 흘린 뒤 적당히 옷을 갈아입으라는 핑계를 대고 화원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그녀의 계획이 전부 수포로 되어 버렸다.
‘쟤는 무슨 손이 저리 빨라? 괜히 옆에 있던 양 씨만 화를 당했잖아!’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되고 나자 평남왕 비는 애써 화를 억누르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년을 끌어내지 않고!”
주최자인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손님의 얼굴에 차를 엎다니, 그야말로 왕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상황이었다.
이윽고 시녀는 절망스러운 눈으로 위문을 쳐다보며 끝까지 살려달라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밖으로 끌려나갔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평남 왕비가 미안한 표정으로 양 씨에게 사과했다.
“내가 아랫것들 교육을 제대로 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합니다.”
하지만 양 씨는 얼굴을 닦느라 바빠 그녀의 말에 대답해 줄 여유가 없었다.
이에 평남 왕비는 위문을 흘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문아, 부인이 옷을 갈아입으실 수 있도록 네가 모시고 다녀오너라.”
아무리 평남 왕비가 양 씨보다 신분이 훨씬 높다지만 그녀가 주최한 연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이상 어쩔 수 없이 딸을 내세워야 뒷말이 덜할 것이었다.
이를 아는 위문도 내키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양 씨에게 다가가 공손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부인,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윽고 양 씨는 평남 왕비에게 인사치레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위문을 따라나섰다.
이를 본 낙생도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저도 언니와 동생이 화원에서 기다리고 있어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평남 왕비는 마지못해 미소를 지으며 시녀를 시켜 낙생을 배웅하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가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왔나 했는데, 별일 없이 넘어가서 그나마 다행이군.’
***
연회장을 나온 낙생은 밝게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가늘게 뜨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십이 년이 지났는데도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는 평남 왕비의 모습을 보니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편하게 살아왔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하긴, 아들이 태자의 자리에 올라 곧 이 나라의 황제가 될 텐데 잘 못 지내는 게 더 이상하지.’
비록 위강이 황제의 양자로 들어가 두 사람은 더는 호적상으로 모자지간이 아니라고 해도, 수년간의 정이 그리 쉽게 끊어질 리 없었다.
‘위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나면 평남왕부는 더욱 강성해지겠지.’
누구와 달리 어떻게 하면 좀 더 어려 보일까 하는 속 편한 걱정이나 하고 지냈을 평남 왕비를 떠올리니 낙생은 저도 모르게 냉소가 지어졌다.
“낙생 아가씨,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때였다. 앞서 길을 안내하던 시녀가 자꾸만 재촉하고 들자 낙생은 그녀를 향해 살짝 눈을 흘겼다.
“뭐가 그리 급하느냐? 내 천천히 구경이나 하면서 갈 테니 알아서 발이나 맞추거라.”
낙생은 혹시나 위강을 만나지 못할 것을 대비해 이참에 평남왕부의 지형이나 파악해 둘 작정으로 꼼꼼히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래도….”
시녀가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리자 낙생이 다시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왕부는 함부로 구경할 수도 없는 것이냐?”
시녀는 당당하기 그지없는 낙생의 태도에 기가 찼지만 아무런 내색도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럼 왕부가 무슨 일개 저잣거리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당연히 안 되는 거 아냐?’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낙생을 끌고 가고 싶었지만, 고작 시녀에 불과한 그녀가 감히 낙 대도독의 딸에게 손을 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가씨, 그쪽은 태자 전하와 중신을 비롯한 남자 손님들이 계신 곳입니다.”
시녀가 일부러 에둘러 그녀에게 그쪽으로 더는 가면 안 된다는 뜻을 전하자 낙생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안다. 그리고 내가 언제 저기로 간다고 했느냐? 그냥 구경이나 좀 하면서 둘러보겠다는 거지.”
낙생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시녀도 더는 그녀를 말릴 수 없어 잠자코 낙생의 뒤를 따랐다.
‘에휴, 그냥 가만히 있자. 듣자 하니 지난번에는 재상의 딸까지 때렸다던데, 괜히 나섰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몰라.’
더는 옆에서 떠드는 사람이 없어지자 낙생은 마치 자신의 집인 양 평남왕부를 거닐며 머릿속에 본 것들을 새기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으로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우선 정보를 많이 알아두자.’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시녀는 곧바로 사색이 되어 낙생을 나무 뒤로 잡아당겨 몸을 숨겼다.
“형님, 얼른 갑시다. 그동안 모비께서 형님이 오시길 얼마나 기다리셨다고요.”
곧이어 형님이라고 불린 사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위풍아,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형님이 아니라 전하라고 부르라니까. 누가 듣고 오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이를 들은 낙생이 깜짝 놀라 나뭇가지 사이로 쳐다보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비슷한 체격을 가진 두 사내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한 사람은 아직 풋풋한 티를 벗지 못한 어린 소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성숙미가 물씬 풍기는 사내였다.
그중에서도 낙생은 나이 많은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눈빛이 더 깊어지고 분위기도 엄청 달라졌어. 걸음걸이마저 어엿한 사내가 다 되었구나.’
과거 그녀와 동갑이었던 위강은 지금쯤 스물아홉이 되었을 터, 사내로서는 가장 전성기일 나이였다.
이내 낙생은 기억 속 앳된 모습에 장난기 가득했던 위강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십이 년 전 모습도 다 거짓이었을지도….’
위강이 정말로 자신을 사랑했다면 진남왕부가 역모를 꾀했다는 거짓 증거를 황제에게 말하지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죽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낙생은 애써 가슴에 사무치는 한을 가라앉혔지만 이를 숨기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 그녀의 손에 잡힌 여린 꽃잎이 힘없이 부서지면서 손가락을 붉게 물들였다.
이윽고 위풍이라 불린 소년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러자 위강이 더욱 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왕비께도 조카인 내 걱정은 그만하시라고 전하고.”
“전하!”
“왜.”
“오늘은 모비의 생신입니다!”
위강이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찾아왔지 않으냐?”
말로는 평남 왕비의 생신이라 그녀를 보러 왔다 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자신이 평소에는 이곳에 올 필요가 없다며 분명하게 선을 긋는 듯한 태도였다.
이에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낙생은 의문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위강이 평남 왕비에게 살갑게 구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냉정하지는 않았다.
‘황제때문에 일부러 평남왕부와 거리를 두는 건가?’
예기치 못한 위강의 등장에 내심 그녀도 충격이 컸는지, 평소 차분하던 낙생은 그에게서 눈을 뗄 줄 모르고 온갖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 사이 위풍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하, 아직도 그 일로 부왕을 탓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위강이 순식간에 얼굴을 굳히며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리가. 나야 그 덕에 태자의 자리까지 올랐으니 숙부님께 감사드려도 모자랄 판이지. 위풍아, 너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니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어서는….”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울려 퍼진 비명소리에 두 사람의 대화는 즉시 중단되었다.
겁에 잔뜩 질린 여인의 목소리에 위강과 위풍은 바짝 긴장했다. 방금 두 사람의 대화에 이상한 점은 없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남의 귀에 들어가서 좋은 내용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위강의 신분 때문에라도 오해의 소지가 불거질 수 있었다.
위강이 큰 소리로 상대를 불러내려던 찰나, 한 여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개양 왕께 볼일이 있어 좀 데려다 달라는데, 시녀 주제에 무슨 말이 그리도 많은 것이냐! 네가 감히, 평남왕부를 등에 업고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냐?”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위강과 위풍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위강이 먼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고 위풍이 그 뒤를 따랐다.
나무 뒤로 가보니 옅은 녹색의 옷을 입은 아리따운 여인이 왕부의 시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에 위강이 싸늘한 목소리로 여인에게 물었다.
“누구냐?”
위강의 물음에 몸을 돌린 여인의 손에는 초록색 뱀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이윽고 그 뱀이 기다란 혀를 내민 채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눈 앞에 펼쳐진 당황스러운 장면에 위강의 점잖았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고작 뱀 한 마리쯤이야 놀랄 것도 없었지만,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손에 뱀을 쥐고 노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위강의 옆에 서 있던 위풍도 마찬가지로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랐는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위강과는 달리 위풍은 그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잠깐, 저 여인은 낙 대도독이 애지중지한다는 낙생이잖아?’
잠시 후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리자, 마찬가지로 가만히 둘을 보고만 있던 낙생이 얼른 무릎을 굽히고 인사했다.
“태자 전하, 평남 왕세자.”
인사를 마친 낙생은 왜 두 사람이 이곳에 있냐는 듯한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위강과 위풍을 바라보았다.
이에 낙생의 눈빛을 눈치챈 위강이 차갑게 대답했다.
“아, 낙 낭자이시군요.”
몇 번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위강은 낙생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처럼 남첩을 데리고 다니며 사내를 희롱하는 여인은 손에 꼽았기 때문이었다.
‘하다 하다 이젠 뱀까지 가지고 놀다니!’
이어 위강은 무심코 낙생의 새하얀 손에 잡혀 있는 초록색 뱀으로 시선을 돌리다 또다시 깜짝 놀랐다.
그녀의 기이한 행동에 뱀을 무서워하지 않던 기억 속 또 다른 여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감히 군주를 낙생 같은 여인과 비교하다니.’
위강의 옆에 있던 위풍이 참지 못하고 초록색 뱀을 곁눈질하며 낙생에게 물었다.
“낙 낭자,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55화. 평남 왕비
아무렇지도 않게 뱀을 만지작거리는 여인을 보고 있자니 위풍은 괜히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음식이 마음에 안 들었나? 아니면 왕부의 경치가 별로인가? 대체 뭐가 성에 안 차서 여기서 이런 짓을 하는 거냐고!’
위풍의 물음에 낙생은 곧 활짝 웃는 얼굴로 작은 뱀을 손에 둘둘 감더니 시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안 그래도 세자께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시녀가 철이 없어서 그런 건지 손님인 저의 사소한 요구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다 거절하더군요. 그래서 이 뱀을 가지고 놀아주려던 참이었습니다.”
낙생의 말에 위강과 위풍은 옆에 있던 시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왕부의 복장을 한 시녀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주저앉아 있었다.
이내 그 시녀가 위강과 위풍의 시선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즉시 땅에 엎드려 사죄했다.
“태자 전하와 세자께 폐를 끼쳤습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위강은 땅에 이마를 박은 채 벌벌 떨고 있는 시녀에게서 눈을 돌려 낙생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평남 왕비의 생신 축하연이니 낙 낭자께서도 이만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는 지금 낙생이 매우 못마땅했지만, 굳이 낙 대도독과 척을 질 필요는 없었으므로 예의상 그녀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는 중이었다.
그런 위강을 본 낙생은 속으로 차갑게 비웃었다.
‘나에게만 상냥하게 구는 줄 알았는데, 다른 여인에게도 친절하게 대하는구나.’
이어 낙생은 손에 들고 있던 뱀을 위강의 얼굴에다 던져버리는 상상을 하며 남몰래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순간 위강은 왠지 모를 섬뜩한 느낌에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 위강을 바라보며 낙생이 다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왕비께는 이미 다녀왔어요. 태자 전하와 세자께서는 다녀오셨습니까?”
“네.”
위강은 아직도 뱀을 붙잡고 있는 낙생을 보며 마음이 언짢았으나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위풍은 그 상황을 참지 못하고 또다시 낙생에게 말했다.
“낙 낭자, 그 뱀은 놓아주시지요, 누가 보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그런데 낙생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