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환
10권
겨울버들잎 장편소설
287화. 깨달음
어색하게 주점 안으로 들어온 낙생과 위한을 번갈아 쳐다보는 석염의 눈이 반짝였다.
‘주인님과 낙생 아가씨의 분위기가 어딘가 좀 바뀐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해 보이는걸.’
“주인님, 문을 열기에는 아직 시간이 좀 일러서 그런데 술이라도 먼저 드시고 계실래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괜찮다.”
위한이 낙생을 쳐다보며 말했다.
“낙 낭자, 먼저 가보겠소. 나중에 다시 오겠소.”
“조심히 들어가세요.”
입구 쪽으로 두어 걸음 걸어간 위한이 석염을 불렀다.
“잠깐 따라 나오너라.”
그 말에 석염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흰 수건을 탁자에 내던지고는 급히 위한의 뒤를 쫓아갔다.
“주인님, 제게 뭐 물어보실 게 있으신 거죠?”
평소에도 그는 낙생과 관련한 일이면 어떤 것이든 꿰고 있었기에, 위한이 무엇을 묻더라도 전부 대답해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위한은 발길이 닿는 대로 그저 앞을 향해 걸어가기만 했다. 누가 쓸어놨는지 길가 양옆에 선 나무 밑으로 눈이 가득했다.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행인조차 뜸했다.
주위를 한 번, 그리고 석염을 한 번 쳐다보고 난 위한은 줄곧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 하나를 어렵게 꺼내놓았다.
“…어떤 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를 매일 만나고 싶을 수가 있느냐?”
그러자 석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뭐… 한칸주점에서 매일 밥을 사준다면 또 모르겠지만요.”
‘어떤 친구이기에 매일 만나도 귀찮지 않을 수가 있지?’
위한이 석염의 대답을 듣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내가 매일 같이 낙 낭자를 보고 싶어 했던 것도 만나는 장소가 한칸주점이었기 때문인가?’
그때 퍼뜩 감을 잡은 석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주인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친구 분이라는 게… 낙생 아가씨입니까?”
위한이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염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탁 짚고서 위한에게 다시 물었다.
“주인님, 설마 낙생 아가씨와 친구가 되고 싶으신 거예요?”
그러자 위한이 왜 그런 이상한 질문을 하냐는 듯한 눈빛으로 석염을 쳐다보았다.
“왜?”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나와 낙 낭자가 친구로도 안 보이는 건가?’
“그냥 단지 친구요?”
답답해진 석염이 언성을 높이며 따지듯 물었다.
‘믿을 수 없어! 날마다 낙생 아가씨께 다가갔던 그 마음을, 그저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다니!’
“…그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친구.”
요 며칠 낙생과 함께 감나무를 보던 기억을 문득 떠올린 위한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런 위한의 표정과 달리 석염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나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인님, 혹시 이제까지 낙생 아가씨께 설렜다고 생각하신 적은 없으세요?”
석염의 당돌한 질문에 위한이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췄다. 평온했던 그의 가슴이 불현듯 급히 뛰기 시작했다.
‘이게 설레는… 건가?’
“남녀 사이의 설렘 말이에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 그런 종류의 설렘이요!”
자신의 감정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듯한 위한의 모습에 석염은 안타까워 순간 무릎까지 꿇을 뻔했다.
‘주인님이 이쪽으로는 조금 둔하신 편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니 좋아하는 여인의 환심을 어떻게 사야 하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본인의 마음조차 모르고 계실 줄이야!’
석염이 답답해하는 동안 위한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낙 낭자를 아내로 맞이한다고? 그럼 나는 매일 눈을 뜰 때마다 가장 먼저 낙 낭자를 볼 수 있고, 또 잠자리에 들 때도 낙 낭자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을 거야….’
이런 생각에 마음이 들뜬 위한이 석염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겉보기에 평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위한을 보며 오해한 석염은 속으로 당황했다.
‘설마 지금까지의 일이 전부 내 착각일 리 없어. 주인님이 낙생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할 생각도 없이 그저 장난이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석염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이대로 주인님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시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주인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거예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더는 배웅할 필요 없으니 그만 돌아가서 상이나 닦거라.”
위한의 말에 석염은 잠시 침묵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그러나 위한이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며 협박에 나섰다.
“석일이와 일을 바꾸어야 만족하겠느냐?”
어쩔 수 없이 석염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위한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했다.
‘낙 낭자는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닌 게 분명한데….’
위한은 고민할수록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뾰족한 수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 낙생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싶었다.
마침내 왕부로 돌아간 위한은 얼마 못 가 냉정함을 되찾았다. 다행히 천금방 쪽 일도 모든 것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
도박이 한창인 저녁 무렵, 열기에 휩싸인 도박꾼들은 어느새 도박장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당신들은 누구시오?”
그중에 묘한 기운을 감지한 천금방 쪽 사람 하나가 사나운 목소리로 물었다.
“관아에서 범인들을 체포하러 왔다.”
엄숙한 대답과 함께 옷차림으로는 다른 도박꾼과 다를 바 없어 보이던 평범한 젊은이가 갑자기 영패를 꺼내들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이놈들을 잡아들여라!”
그러자 즉시 십여 명의 사내들이 칼을 뽑아 들고서 옆에 있던 사람들을 제압해나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박의 희열에 물들었던 도박장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도박장이 한바탕 소란해졌다.
방금 그 젊은이가 또다시 소리 높여 외쳤다.
“우리는 범인을 체포하러 온 것이니 죄가 없다면 그 자리에서 꼼짝 말고 기다리거라. 칼에는 눈이 없으니 재수 없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일개 도박꾼들은 이 말을 듣고 놀라서 감히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하지만 암살 조직과 관련이 있는 자들은 모두 저항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관아의 병사는 전부 실력이 출중한 고수인데다 수적으로도 우세하다는 현실을 그들은 까무룩 잊고 있었다. 얼마 못 가 그들은 전부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수라장 속에서 주 집사는 도박꾼들 무리 속에 섞여 있었다. 그는 넋이 나간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관아 병사들이 사람을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주 집사, 우린 이제 어떡합니까?”
주 집사의 벌어진 입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즉시 돌아가 주인에게 이를 알리시오.”
얼마 안 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천금방 주인은 텅 빈 도박장을 보며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얼떨떨한 정신을 추스른 그가 침울하게 물었다.
“동생,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도박꾼으로 위장해 있던 병사들이 갑자기 사람들을 잡아갔습니다….”
“누가 잡혀갔지?”
주 집사가 난처해하며 명단을 건네주었다. 이를 재빨리 훑어보던 천금방 주인이 주 집사에게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이들 중 대부분이 동생과 가까운 사이인데, 무엇 때문인지 진정 모른다는 거야?”
“저는 정말 모릅니다.”
“됐어. 내가 가서 알아보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천금방 주인은 그 길로 도박장을 떠나 황급히 누군가를 찾아갔다.
***
도성의 도박장 중에서도 오래된 곳이었던 천금방은 귀족이 밀집한 서성(西城) 지역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왔다. 사실 주 집사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자도 원래는 일을 대신 처리하는 대리인이었을 뿐, 천금방의 실질적인 주인은 따로 있었다.
천금방 주인의 보고를 듣고 난 실소유자는 인맥을 이용해 이곳저곳 소식을 알아보다 결국에는 위한 쪽까지 선이 닿았다.
“도박장은 정월 대보름까지 휴업하는 것으로 하고 의동생이라던 자를 당장 내보내시오.”
비록 연행된 사람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것이 대수가 아니었다. 앞으로의 안전한 운영을 위해서라면 문제가 있는 사람은 일단 내보내는 게 도박장의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조만간 쫓겨나야 한다는 소식을 들은 주 집사는 천금방 주인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한 뒤 말없이 천금방을 떠났다.
하늘에서 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가운데 주 집사는 텅 빈 표정을 한 채 성문 방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청행가를 지나가던 그는 언뜻 휘날리는 청색 깃발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그곳에는 ‘한칸주점’이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눈보라 속 깃발을 응시하던 주 집사는 문득, 그 언젠가 철부지 아가씨가 했던 제안을 떠올리고 무릎을 쳤다.
애초에 성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병사들이 데려간 사람들 중 그의 사람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중에 본인만 무사히 화를 피해간 것에 대해서도 석연치 않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
‘상대편이 나를 빼먹은 건가? 아니면 더 큰 수확을 얻기 위해 잠시 풀어둔 건가?’
그는 후자를 더 의심하고 있었고, 이를 확인하려면 도성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도성을 벗어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야. 자발적으로 적의 눈에 띄게 되는 셈이니 차라리 발붙일 곳만 있다면 도성에 남아 있는 게 낫지….’
그렇게 주 집사는 눈보라 속에 나부끼는 청색 깃발을 바라보며 결심을 굳혔다.
***
아직 개점 시간이 아니라 그런지 한칸주점 앞은 한산했다. 문밖에는 참새들만 먹이를 찾아 종종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때였다. 대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홍두가 나왔다. 그녀의 뒤로 석염이 연이어 따라 나왔다.갑작스런 인기척에 놀란 참새들이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참새 꽁지를 쳐다본 홍두가 입술을 삐죽이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놈의 참새들은 날이 갈수록 눈치만 빨라진단 말이야. 지들 먹을 것만 쏙쏙 빼먹고는, 잡을 만하면 달아나 버리잖아!"
주위를 둘러보던 홍두가 이내 주 집사를 발견하고는 놀라 말을 걸었다.
“당신… 천금방의 주 집사죠?”
홍두의 물음에 주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홍두가 즉시 돌아서서 주점 안쪽을 향해 외쳤다.
“아가씨, 천금방의 주 집사가 찾아왔어요! 며칠 전 그곳에 일이 있었다더니, 갈 곳이 없어서 찾아왔나 봐요!”
홍두의 거리낌 없는 외침에 주 집사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생각했다.
‘점원의 말이 사실이기는 해도, 막상 저리 말하는 걸 들으니 다 관두고 도망가고 싶군….’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잠시, 밖으로 나온 구월이 입구에 서서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주 집사님, 아가씨께서 들어오라고 하시네요.”
주 집사는 잠시 망설이다 안으로 들어갔다. 주점 안에는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낙생은 창가 옆 책상에 앉아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낙 낭자.”
주 집사의 부름에 낙생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주 집사께서 생각이 바뀌셨나 보군요. 저희 주점에서 일하실 겁니까?”
장부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점장은 낙생의 말을 듣고서 경계의 눈초리로 주 집사를 쳐다보았다.
‘집사 일을 하다 온 사람이 주점에 와서 일하게 되면, 가장 적합한 자리가 ‘점장’ 아니야? 아… 설마 내가 일을 잘 못해서 아가씨가 점장을 바꾸시려는 걸까? 그럴 리가! 내가 장부를 얼마나 꼼꼼하게 정리하는데. 최근 기록에는 귀인들이 온 시간까지도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고! …그래도 만족스럽지 못하신 걸까?’
점장은 놀란 가슴으로 상황을 주시하며 주 집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한 점장의 반응에 주 집사 또한 한쪽 눈썹을 움찔거렸다.
‘낙 낭자의 소문이야 이미 파다하다지만, 어째서 저 여인도 나를 계속해서 빤히 쳐다보는 거지?’
주 집사는 불편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낙생에게 예를 표했다.
“저는 오늘부로 더 이상 천금방에서 일하지 않습니다. 만약 아직도 저 같은 자가 필요하시다면, 낙 낭자께서 받아 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이리 찾아온 것입니다.”
288화. 낙부의 손님(1)
주 집사의 말에 점장이 굳은 얼굴을 한 채 주판을 힘껏 움켜쥐었다. 반대로 낙생은 생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희 주점은 장사가 잘 되니 당연히 주 집사 같은 분의 도움이 필요하죠.”
“제가 이곳에서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점장의 일 중에 회계를 담당할 사람이 부족했어요.”
낙생의 말에 점장이 분한 듯 아랫입술을 떨었다.
‘저는 다른 사람과 일을 분담할 필요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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