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을 깨끗하게 5권
왕관을 깨끗하게 5권
 
차례
 
30장
31장
32장
33장
34장
35장
36장
왕관을 깨끗하게 5권
 
30장
 
 
 
우고 솔로몬의 발소리는 이미 멀어진 지 오래지만, 두 사람 모두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마테오.”
탁자 아래에서 치맛자락을 수습한 베레니체가 낡은 노트를 움켜쥐고 탁자 아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해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마테오를 바라보았다.
“파브리아노 살비아티의 일기장을 왜 여기 둔 거예요?”
“그건, 베레니체.”
마테오가 옷매무새를 추스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생각하는데 목이 꽉 막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베레니체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파브리아노 살비아티. 베레니체의 쌍둥이 형제를 죽게 한 장본인으로 알려진 사람. 베레니체에겐 저 사람이 원수나 다름없을 테지.
오해가 생기기 전에 해명해야 한다. 어째서 그가 파브리아노의 일기장을 집무실 탁자 아래에 숨겨 두었는지, 왜 그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지…….
“미안해요.”
마테오가 고개를 떨어뜨리며 주저하며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요.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지만, 이렇게라도 단서를 찾아야 했습니다.”
“도움이라고요? 왜요?”
되묻는 그녀의 눈빛은 침착하지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다.
“불편한 거 알아요, 베레니체.”
마테오가 베레니체의 손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먼저 분명히 말해 두겠습니다. 나는 이 범죄자를 옹호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요. 당신이 엔리케의 죽음을 되새기게 될까 봐 상의하지 못한 것뿐이에요. 다만, 당신도 알다시피,”
“…….”
“난 리아델리에게 굽히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던 마테오가 눈을 내리깔았다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네. 그래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은 부족해요. 아버지들이 닦아 놓은 기반은 너무나 탄탄하고, 거기에 맞서려면 나도 무기가 필요합니다.”
“…….”
“가주들이 리아델리에게 저토록 매여 있는 원인을 찾고 싶었어요. 서로서로 맞물린 약점이 뭔지 알아내야 했습니다. 세 가문의 동맹을 부수고, 상황을 반전시킬 단서가 필요하니까요. 그게 뭐든 간에 뒤져 보고 싶었으니까요.”
마테오는 베레니체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턱끝에서 뚝, 떨어지는 걸 보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해서 차마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물러서지 않았다.
“리아델리, 델 브렌타, 그리고 소포리니 세 가문 모두와 가장 치열하게 반목한 사람은 파브리아노 살비아티입니다. 또…….”
그가 입을 다물자 베레니체가 일기장의 표지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거두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 기억엔 거의 없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조금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자와 내 아버지 사이 어떤 공통점이 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두 사람이 무척 가깝게 지냈다는 것 같았어요.”
비토리오를 언급하는 마테오의 말투는 눈에 띄게 건조하고 딱딱해졌다. 그 경직된 표정을 바라보던 베레니체가 조용히 물었다.
“아버지라면…… 비토리오 델 브렌타 님을 말하는 거죠?”
“맞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차남을 가주로 지목하자 열등감에 휩싸였던 사람이었죠. 그는 자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끝내 사병들을 일으켜 살바토레 델 브렌타를 내치려 했다가 칼을 맞고 죽었습니다.”
껄끄러운 말끝을 삼켜 낸 마테오가 입술을 굳게 닫았다. 그동안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지만, 문득 엔조가 선택받은 자리에 올라섰을 때 제가 느꼈던 분노와 절망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버지와 자신은 다르다. 숙부도 늘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마테오는 변명처럼 작게 덧붙였다.
“자주 언급하지 않았지만, 삼촌은 늘 아버지가 뜬구름 잡는 몽상가였다고 했어요. 그래서 조부께서 늘 못마땅해 하셨다고 했었죠. 현실적이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그럼, 이 일기에도 그분에 대한 내용이 쓰여 있었나요?”
말없이 마테오를 바라보던 베레니체가 일기장을 가리켰다. 아직 눈꼬리에 물기가 묻어 있지만 한결 침착해진 표정이었다.
“아직 제대로 보지도 못했습니다.”
마테오가 고개를 저었다.
“받은 지 얼마 안 되었어요. 후마니타스의 당신 친구, 마리아 오르시니가 떠올라서 그녀에게 부탁했었거든요.”
“마리아가요? 당신에게?”
“절친한 친구라고 했으니, 파브리아노의 기록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긴 한데…….”
당혹스러워하며 일기장을 내려다보던 베레니체가 낡은 겉표지를 들추어 보았다. 조심스럽게 첫 장을 펼친 베레니체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보지 말아요.”
마테오가 손을 내밀어 베레니체를 제지하려 했으나 그녀는 듣지 않았다. 표지 안쪽에 잘 갈무리된 쪽지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눈빛은 어딘가 꿈꾸는 사람처럼 아득했다.
“마테오.”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어린아이가 남긴 삐뚤빼뚤한 글씨를 멍한 눈으로 오랫동안 내려다보던 그녀가 마침내 마테오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거, 다 읽었어요?”
“아니, 아니에요.”
“어린아이의 쪽지가 붙어 있기에 강아지가 어쩌고 하는 대목만 조금 살피다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말을 이어 가던 마테오는, 돌연 새파랗게 질린 베레니체의 얼굴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설마……. 설마.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 일었다.
혹시, 엔리케가 쓴 쪽지는 아닐까? 그러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혹시 그가 소년에게 집착하는 병적인 이상성애자였다면, 이런 것 하나까지 모두 모아 두었을지도…….
“베레니체, 당신이 파브리아노를 용서하지 못하는 건 당연해요.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보겠습니다.”
마테오는 거의 빌다시피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런 말을 꺼내는 것조차 너무, 너무 미안했지만…….
“그러고 나면, 난 벨레짜에서 이 사람의 남은 흔적을 모조리 다 없애 버릴 겁니다. 주저 없이 이것들을 태워 버릴…….”
아, 이미 늦어 버렸다.
베레니체가 일기장을 꼭 끌어안더니 눈을 내리감는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눈시울은 더욱 빨갛게 달아오르고, 눈초리에 고인 투명한 눈물이 뺨 위를 또르르 굴러 뚝, 뚝 떨어진다.
“베레니체.”
머릿속이 새하얗게 달아나 버린 마테오가 베레니체의 어깨를 끌어안으려 했을 때였다.
“고마워요, 마테오.”
……고마워요?
어리둥절해 하던 마테오의 표정을 본 베레니체가 살며시 웃으며 눈가를 닦아 냈다.
“파브리아노 아저씨는 제 은인이에요.”
“은인이라고요……?”
그녀는 마치 일기장에 생명이라도 깃들어 있는 듯 굴었다. 엄지로 책등을 부드럽게 살살 쓸기도 하고, 재회의 기쁨으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일기장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활짝 펼쳐 마테오의 앞에 내밀었다.
“보세요, 아저씨가 모아 둔 이 메모들은,”
마테오는 베레니체가 손끝으로 하나하나 그 쪽지들을 더듬어 만지는 것을 보며 숨을 삼켰다.
“다 제가 쓴 거예요.”
“그럼…….”
혼란에 휩싸여 있던 마테오는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어린 베레니체가 파브리아노 살비아티를 이미 알고 있었다면. 그 계기는…….
“당신이 생각하는 게 맞아요.”
조용히 흘러나온 베레니체의 목소리가, 쪽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마테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마테오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줄리아노 소포리니가 파브리아노를 죽이려고 했었군요.”
“한밤중에 칼을 품고 찾아갔던 집 중 하나였어요. 이미 경험이 쌓였을 때라, 전처럼 두려워하진 않을 때였죠.”
묵은 먼지 냄새가 묻은 종잇장의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며 베레니체가 중얼거렸다. 마테오는, 아내의 차분한 회고를 따라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갔다.
 
깊은 밤, 한여름의 더위가 가시고 밤은 조금씩 서늘해질 무렵이었다.
어둠 속을 걷는 작은 소녀의 몸에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건물의 벽을 타고 불쑥 치솟았다가 금세 자취를 감춘다.
소녀는 동편 구역의 주택으로 향했다.
낡은 집이지만 널찍하고, 잘 가꿔진 마당은 정갈하게 구석구석 잘 관리되어 있다. 문단속을 잘하는 것 같지 않은 집이어서 침입은 수월했다. 마른 체격의 소녀는 능숙하게 담을 기어 올라가서, 부엌 쪽의 덧창을 열고 건물 안으로 쑥 사라진다.
삐걱대는 널빤지 바닥을 밟으며 나아간다. 낮에 봐 두었던 늙은 하녀가 코 고는 소리가 벽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귀가 어둡고 눈도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벽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다가, 주인이 이 늦은 시간까지 귀가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려울 건 없었다. 기둥을 타고 천장 위쪽으로 올라간 소녀는 낡은 판자를 조금 들어낸 다음 천장의 아래에 몸을 붙여 숨으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막 기둥을 단단히 붙들고 발을 걸치려 했을 때, 등 뒤에서 타다닥, 작은 발소리와 함께 헥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장으로 굳은 소녀의 발목에 무언가 스쳤다. 촉촉한 것이 닿아 오는 순간, 움찔 발을 빼려던 소녀의 눈에 낯선 방해꾼의 정체가 들어왔다.
활짝 웃는 듯한 얼굴로, 빤히 올려다보는 새카만 눈동자. 촉촉이 물기를 머금은 코와, 깨끗하고 맑은 동그란 눈동자. 감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팔랑팔랑 흔들리는 꼬리…….
아주 귀엽고 조그마한, 한 마리의 강아지가 베레니체의 신발을 깨물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기둥을 타고 올라가려 해도 옷자락을 물고 놓아주질 않았다.
어떡하지?
새파랗고 차가운 빛이 감돌던 눈동자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소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강아지를 내려다보았다. 차마 저리 가라고 뿌리칠 수가 없었다.
딱 일 분만, 일 분만 쓰다듬어 보면 안 될까……?
안 돼. 베레니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귀엽다고 해도 임무 중에 강아지에게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될 일이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방심할 수는 없었다.
“있잖아, 지금은 너랑 못 놀아. 미안해.”
베레니체가 진지하게 속삭이며 다시 기둥을 붙들려 할 때였다. 열렬히 꼬리를 흔들어 대는 하얀 곱슬 털 강아지가 앙! 하고 작게 짖었다.
“……안 돼.”
제법 단호한 목소리를 냈지만, 한껏 기대에 차서 그녀를 올려다보는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를 외면하기란 쉽지 않았다.
베레니체가 흔들리는 것을 눈치챘는지, 영리한 강아지가 또 한 번 관심을 호소한다. 앙!
결국, 베레니체는 강아지를 향해 돌아섰다. 주인이 올 것 같으면 재빨리 기어 올라갈 생각으로, 기둥 옆에 쭈그리고 앉아 강아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깐만이야. 알겠지?”
난리가 났다. 강아지는 베레니체의 손바닥에 젖은 코를 파묻고 킁킁대더니 곧 작고 따뜻한 혀로 손바닥을 할짝거리기 시작했다.
“너도 혼자 있으니까 무섭고, 외로웠어?”
마지못해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자, 강아지는 기다렸다는 듯 베레니체의 무릎 위로 폴짝 올라앉았다. 자그마한 두 발로 베레니체의 몸을 짚고서는, 베레니체의 턱과 뺨을 할짝할짝 핥기까지 했다.
“아, 간지러워.”
까끌하고 따뜻한, 하지만 축축한 혓바닥이 닿자 베레니체가 눈을 감으며 웃었다.
한참이나 까불던 강아지는, 베레니체가 손끝으로 귀 뒤를 살살 긁어 주자 점점 얌전해졌다. 나중엔 제 쉴 자리가 여기라는 듯 눈을 사르르 감더니 나른하게 숨을 골랐다.
베레니체는 제 품 안에 편안하게 안겨 있는 천진한 동물을 내려다보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조그마한 몸이 부풀었다 가라앉는다.
얇고 보드라운 살가죽을 손끝으로 살살 쓰다듬으면 따스한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쉴 새 없이 콩콩 뛰는 심장의 박동도 마찬가지.
힘차게 숨 쉬는 생명을 보니 마음이 슬퍼진다. 베레니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생각을 하자. 그래야 한다.
손으로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면서도, 베레니체는 재빨리 집 안을 훑었다. 늦은 새벽까지 이 귀여운 강아지를 혼자 두는 주인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방 한가운데의 낡고 큰 탁자와 의자 하나, 깃펜을 꽂아 두는 통과 이런저런 문구류 몇 점이 흩어져 있을 뿐. 값어치가 있어 보이는 물건들은 하나도 없었다. 나무 벽에 걸어 둔 작은 판화 몇 점이 유일한 장식이랄까.
나머지 공간은 온통 책뿐이었다. 묵은 먼지 냄새를 풍기며 좁은 집을 터질 듯 메운 책들은 언뜻 보기에도 소포리니 팔라초의 도서관만큼이나 가득 차 보였다. 여기도, 저기도 높다랗게 쌓인 책 더미가 점령 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귀 밝은 강아지가 번쩍 고개를 드나 싶더니 쏜살같이 닫힌 방문 앞으로 튀어 나갔다. 주인이 돌아왔음을 직감한 베레니체도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거미처럼 민첩하게 기둥을 타고 올라간 소녀는, 천장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나무 보 사이로 재빨리 자취를 감추었다.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베레니체는 번번이 때를 놓쳤다.
대들보에서 사내의 몸 위로 뛰어내리듯 몸을 날릴 수도 있었다. 혹은 그가 잠들 때까지 기다린 후에, 조용히 어둠 속에서 미끄러지듯 기둥을 타고 내려가도 충분했을 터였다. 혹은, 그의 주전자에 독을 묻히고 조용히 사라진다거나.
그나마, 사내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해 다행이었다. 높은 천장 위에서, 몸을 웅크린 소녀가 칼을 품고 자신을 내려다볼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 한 듯했다.
냉정하게 생각해. 내 일을 해야 해.
베레니체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바로 그 작은 개 때문이다. 베레니체에게 하던 그대로 제 주인을 열심히 반기던 강아지는, 밤늦은 시간까지 제 주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