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류무사 11
§ 차례 §
무당오송(武當五松)
오행검진
사물의 본질
백 년 전의 송문검인(松紋劍印)
해시(解詩): 쌓여만 가는 의혹
연(緣)
가면
일인이역
합류
무당오송(武當五松)
목 자 노인이 분노와 놀람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무당인들을 제지했다.
그토록 흥분한 오십여 명의 도사들이 단 한 번의 손짓에 모든 행동을 멈추는 것으로 보아 과연 무당파 내에서 그의 입김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하운이라고 합니다. 이름 높은 무당의 다섯 어르신을 뵙게 되어 삼생의 영광입니다.”
“북궁단야라 합니다.”
둘 모두 무당의 다섯 원로들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는지라 포권으로 예를 표했다. 무슨 일로 장추삼이 무당에 왔는지는 몰라도 일단 노강호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하니까.
“빈도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소개는 생략하겠네. 그래, 어쩐 일로 우리 무당에 방문한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지라 하운과 북궁단야는 먼 산을 봐야 했다.
그들이 약속된 호북의 객잔에 도착한 것은 장추삼이 정화진을 데리고 무당으로 길을 나선 직후였다.
아무리 늦었다고 해도 그것 가지고 삐쳐서 제 갈 길을 갈 리가…… 있는 장추삼이지만 그래도 뭔가 표식 같은 거라도 남겼나 해서 그가 묵었다는 객방을 돌아본 둘은 침상 밑에 쓰인 흑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기다릴 만큼 기다린 거거든.
무당 장문 만나러 가니까 기다리든 찾아오든 맘대로 해.
급해, 시간 없어.
―장추삼
그래서 허겁지겁 균현으로 말을 몰아 무당산을 오르던 중 수풀에서 떨고 있는 정화진을 만나 자초지종을 듣고 평소의 그들과는 달리 기별도 넣지 않고 무당파에 들어선 와중에 장추삼과 도사들의 싸움을 목격한 것이다.
싸움을 막기 위해 급히 검을 뽑아 들기는 했지만 사실 아는 바는 하나도 없는 터. 대체 뭘 알아야 대답을 할 것 아닌가.
‘비록 바보라지만 생각 없이 일을 벌일 놈은 아닌데. 어디서 도사들하고 시비라도 붙은 게 아닐까? 만약 그런 이유라면…….’
두 주먹을 꽉 쥐며 이런 생각을 누가 했는지는 말 안 해도 뻔한 일이고.
‘전에 없이 다급해 보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무당파가 왜 나오는 건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친구라서 알 도리가 없구나.’
한숨을 푹 쉬며 스스로가 처량하다는 생각에 하운은 고개를 저어야 했다.
“그거 이상한 일이로군. 자네들은 서로가 잘 아는 사이라고 들었는데…….”
“잘 안다고 해서 반드시 동류(同類)는 아니오!”
바보와 같은 취급을 받기 싫어서 북궁단야가 급히 대답했다.
그런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런 대답을 원한 질문이 아니었기에 목 자 노인이 어이없는 얼굴로 북궁단야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당당했다.
저 바보 놈과 동격 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죽고 말 북궁단야였으니까.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 하지만 노강호는 괜히 노강호가 아니다. 뭔가 있기는 한데 알 도리는 없으니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지금 그런 문제를 논할 계제는 아니었으니까.
“어허험, 아무튼 좋네. 그러니까 자네들은 괴성을 따라 이곳에 온 모양이로군. 그렇다면 자네들이 무당에 볼일은 없다고 봐도 될 터이고.”
“잔말 말고 약속대로 장문이나 만나게 해 줘요!”
크르릉거리는 장추삼을 멀거니 보던 목 자 노인이 옆에 서 있던 화 자 노인에게 물었다.
“약속? 난 약속 같은 걸 한 기억이 없는데. 혹시 사제가 약속을 했나?”
“그럴 리가 있습니까, 무량수불.”
이번에는 그가 수 자 노인에게 물었다.
“그런 삼사제인가?”
“당치 않습니다, 무량수불.”
이렇게 네 노인에게 일일이 묻고 목 자 노인이 헐헐 웃었다.
“보게, 약속을 한 사람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럼 자네는 누구와 약속을 했다는 거지?”
“아까 싸우기 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분기탱천한 장추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역시 동료가 좋기는 좋다.
“무슨 말?”
“이 싸움을 이기면 장문을 만나게 해 달라고요! 기억 안 나는 거예요?”
“아…… 그 말? 들었지. 똑똑히 들었네.”
목 자 노인이 선선히 인정하자 기고만장해진 그가 쾌재의 빛을 만면에 지으며 허리에 왼손을 척 하니 얹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자, 자! 그러니까 어서 장문을 불러 달란 말이오. 설마 수양 깊은 도사님들이 어린 후배와 한 약속을 어기지는 않겠지?”
“물론이네. 우리가 비록 수양이 얕다고 해도 어린 후배와의 약속을 어길 리가 있겠는가.”
이제 됐다, 는 표정으로 옆의 하운을 어깨로 툭툭 밀며 키득거리던 장추삼이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뭐야?”
도사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단 한 사람도.
“에이, 씨! 약속을 안 지키겠다는 거야? 진짜 사람 열받게 하네! 그래, 한번 해보자는 말이지? 좋다, 이 말코들아. 내 오늘 이런 치사한 도사들을…….”
“자꾸 약속이라는 말을 들먹이는데…… 약속이란 혼자서 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무슨 바보인 줄 아오!”
하마터면 어……라고 답할 뻔했지만 간신히 눌러 참고는 북궁단야가 노도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의 표정과 어투에서 특별한 적의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와 약속했나, 자네?”
“예?”
“누구와 약속했냐고 묻지 않는가.”
“어, 그게…….”
방금 전의 상황을 되짚던 장추삼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대답을 듣지 못했다!
멍청하게 혼자 흥분해서 어떤 말도 없이 판을 벌였던 거다! 조금만 더 침착했다면 확답을 듣고 나서 싸웠을 일인데.
“제, 젠장…….”
억울함에 부들부들 떨던 그가 노도사를 쏘아보았다.
“그럼 면담을 안 해 주겠다는 거요?”
“아니. 우리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장문도장과의 면담을 주선해 주겠네.”
“진작 그럴 일이지! 부탁이 뭐요?”
말코와 치사한 도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별거 아니라네.”
목 자 노인의 말과 함께 나머지 네 노도인들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와 비무를 하는 걸세. 목숨을 뺏자고 하는 것은 아니니 그리 큰 부담을 가질 것은 없어. 강호의 동도들이 이런 광경을 본다면 나이 헛먹고 노망든 늙은이 다섯이 젊은이 하나를 핍박한다고 흉보겠지만, 내 기꺼이 욕을 감내하겠네.”
“노인장들하고 한판 하자고요…….”
떨떠름한 얼굴로 인상을 구기던 장추삼이 문득 북궁단야를 돌아보았다.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섬뜩함에 북궁단야가 고개를 돌리는데 이미 장추삼은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노인네들과의 싸움은 지겹단 말이다!
“나 같은 약골과 싸워 봐야 뭔 재미가 있겠소? 여기 검 한 자루로 천하를 양단할 고수가 있어요. 등에 걸린 검은 그저 크기만 한 게 아니거든요! 거기다 얼굴까지 잘생겼잖아요!”
“너 이놈!”
분노에 찬 북궁단야의 서슬을 애써 외면하며 장추삼이 계속 나불거렸다.
“제대로 붙는다면 이 검에 삼 초 이상을 버텨 낼 인물이 현 무림에 몇이나 될지 모를 검객! 당문의 팔대장로인 방교명 장로도 인정한 고수 중의 고수! 한성 북궁단야야말로 노인장들에게 어울리는 상대라오!”
엄청난 살의의 파동을 느꼈지만 장추삼은 의연했다.
북궁단야의 차디찬 독백까지 버텨 낼 정도로 그는 노인들과의 싸움이 싫었다.
“나중에 보자…….”
‘나중은 얼어 죽을. 지금이 죽도록 싫은데 나중 생각을 할 겨를이 어디 있어?’
목 자 노인의 한마디는 그의 노력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됐네.”
“예?”
“됐다고 했네.”
“여태까지 한 말 못 들은 거예요? 나보다 훨씬 세다니까!”
“한발 나서는 것만으로 장내 전체에 압박감을 심는 이는 많지 않지. 굴강한 기도와 만인을 압도할 눈빛. 저만한 나이에 저만한 기품을 지녔으니 삼성이라 칭해도 아깝지 않구나! 하지만 오늘 한성과는 볼일이 없네.”
당황한 그가 멀뚱멀뚱 서 있는 하운에게 달려갔다.
“그럼 천재 검수 하나를 소개해 드리죠! 이 사람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백 년 전의 초식을 그림 몇 장 보는 것만으로 그 느낌까지 생생하게 재현할 만큼 놀라운 오성을 지닌 검객으로서…….”
“장 형…….”
난처하게 웃으며 두 손을 내젓는 하운을 가만히 쳐다보던 목 자 노인이 뜻 모를 말을 던졌다.
“눈가에 어린 현기로 보아 보통 수양을 쌓은 아이가 아니로구나. 일반인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도기를 숨길 만큼의 깊이라……. 언제 한번 다시 무당을 찾아 주게. 그렇지만 오늘은 유성과도 볼일이 없어.”
“그렇다면…….”
울상이 되어 버린 장추삼을 가리키며 목 자 노인이 껄껄 웃었다.
“우린 자네와의 비무를 원할 뿐이라네, 괴성 장추삼.”
“꼭 나여야 하는 이유가 뭐예요?”
볼멘소리로 중얼거리는 장추삼을 유쾌한 눈으로 보던 목 자 노인이 손짓으로 무당의 도사들을 물리쳤다. 그에 따라 하운과 북궁단야도 어쩔 수 없이 물러서야 했다.
“나여야 하는 이유가 뭐냐니까!”
그저 말없이 웃는 노인의 얼굴에 옅은 회한의 기운이 감돌았다.
목 자 노인. 본래 도명은 청목자(淸木子).
청화(淸火), 청수(淸水), 청금(淸金), 청토자(淸土子)와 함께 무당에서 보낸 시간이 어언 육십칠 년이 흘렀으니 그야말로 무당의 역사라고 불릴 만한 인물.
‘네겐 미안하지만 우리로서는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구나.’
무당의 최고 배분을 자랑하는 오송이지만 그들에게도 결코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쓰라린 경험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이십오 년 전에 벌였던 한 번의 승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 당시 무림에서 오송은 거의 잊힌 존재나 다름없었다. 막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강호에서 전대의 고수로 평가받는 그들을 기억하는 이도 없었을뿐더러 워낙 속세에도 관심이 없었기에 다섯 명의 고수들은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며 도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이름, 백무량.
치무환검존이라는 이름이 절대오존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해서 오송이 일어섰던 것은 아니다. 단지 검을 잘 쓴다는 무인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같은 검수로서의 검로에 대한 흥미, 또 같은 유파의 문인으로서 깨달음에 관한 흥미…… 이 두 가지의 궁금증은 세속에 초연했던 다섯 명의 노도사를 승부의 장으로 이끈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만남, 그리고…… 패배.
변명 한마디 붙이지 못할 만큼의 완벽한 패퇴였다.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이제 완벽하다고 믿었던 양의문검은 환검존의 차가운 검로 앞에서 기세조차 펼치지 못했으며 설익은 태극혜검으로는 감히 바라보기조차 어려운 상대였다.
여태까지의 승부들 가운데 가장 힘겨웠던 겨룸이었다는 인사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배분에 대한 배려 정도라는 것쯤은 알았으니까.
무당으로 돌아온 그들을 기다리는 건 살아온 인생에의 덧없는 회한, 그리고 참기 어려운 굴욕.
비록 철저히 숨겼던 만남이고 감추기로 했던 승부의 엇갈림이었지만 그들의 가슴에 자리한 엄연한 현실은 늙은 검수들의 칠십 노구를 다그쳤다.
몇 날 며칠을 한숨 속에 보내던 그들은 곧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화산이 배출한 검수를 개인이 꺾을 수는 없다고.
그래서 그들은 뭉쳤다.
오행검진(五行劍陣)이라는 이름 아래.
무당이 자랑하는 천고의 검진, 검으로 펼쳐 내는 가장 완벽한 조화라는 검진. 다섯 명의 힘으로 쉰 명의 힘을 뽑아낸다는 환상의 검진.
무당의 오행검진을 수식하는 수많은 말들이지만 정작 무당의 도인들조차 오행검진의 본래 위력을 견식한 이는 별로 없었다.
오행검진은 검로와 보법에 따라 몸과 검을 움직이는 통상의 검진과는 달리 도가의 근원이라는 음양(陰陽)의 법칙을 완벽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오행의 원리에 따라 몸과 검로를 가져가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한마디로 깨달음이 없이는 제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뜻이니, 어찌 일반적인 검법에 비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도가의 성지라는 무당이라고 해도 음양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한 도인들이 무려 다섯이나 있어야 하고 그 도인들이 모두 일정 수준 이상―검진을 펼치려 할 때 한 사람이라도 나머지 검수들보다 처지게 된다면 검진 자체가 불가능함은 기본적인 일이다―의 검로를 밟아야 하니 그야말로 오행검진처럼 구현해 내기 까다로운 검진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 어렵다는 조건이 충족된 상태에서 검진이 펼쳐진다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발할까.
하지만 깨달음을 쇠붙이로 전달하는 일은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반 문도들이 펼쳐 내는 오행검진 같은 건 염두에 둔 적이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