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물이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자잘한 금모래 위에 흩뿌려진 핏줄기가 떨어지는 노을빛을 받아 서러운 진홍빛을 띠었다. 자신이 만든 그 궤적을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는 남궁상의 흰 석장을 타고 주르륵 핏줄기가 떨어져 하얗게 불거진 손아귀를 지저분하고 끈끈하게 칠했다. 치켜뜬 눈동자의 실핏줄이 터져 혈루가 떨어질 듯했다. 가늘게 울리는 석장 고리의 짤랑거림이 그의 손이 덜덜 떨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아니, 그의 전신이 바람을 맞은 나뭇잎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어 부들부들 떨리는 턱을 붙들어도 얼굴의 경련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그런데도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붙잡힌 듯 한곳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 끝에는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한 사내와 여인이 있었다.'“으으……. 허억!”'뒤틀린 신음 소리가 악물린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상처 입은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비참한 흐느낌.'내가 죽였다. 내 석장으로 저들의 심장을 가루로 부수고, 뼈를 갈랐다. 저들이 누구던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친우고, 사랑하는 여인이다. 목숨도 내어달라면 줄 수 있었다. 친우도 그랬다.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리에 없는,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한 사람도 같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가 널 사랑한 것이 죄인 것이냐. 아님, 네가 날 사랑하지 못한 것이 잘못인 것이냐. 차라리 다른 이를 사랑할 것이지! 차라리 아무 연관 없는 사내를 사랑했다면 이리 어그러지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어리석은 원망인 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흐흐…… 흐흐흐…….”'밀려온 바닷물이 그의 발끝에서 찰싹였다. 지지대처럼 석장에 몸의 무게를 실으며 털썩 무릎을 꿇은 그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서 미친 듯 헛웃음을 날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니야. 이것이 아니야. 이런 것이 아니었어. 무엇이 아닌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이것이 아니라는 말만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그리하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장면이 바뀌기라도 하는 것처럼.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처음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처럼.'―그리한들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또 다른 친구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했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녀의 충고대로였다. 참담하다 싶을 정도로 그녀가 옳았다. 마지막까지 맘을 돌리라 말렸던 그녀. 그녀 또한 그에게 죽임을 당했다. 내 곁에 이제 누가 남아 있는가.'“흐흐…… 흐하하하! 하하하!”'검붉게 변해가는 세상을 향해 광소를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