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집인가 보다.”'소민은 어제 저녁 들뜬 목소리로 전화한 정숙의 말을 받아 적은 메모지를 손에 꼭 쥐고 지나는 사람에게 물어가며 어렵사리 작은 집을 찾아내었다.'하얀 울타리 빨간 우체통 예쁜 그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아담하지만 뭔가 모를 귀여움과 화사함이 묻어나는 예쁜 집이었다. '[“민아 새해 복 많이 받고, 우리 내일 보는 거야. 그렇지?”]'[“네 아줌마. 일찍 갈게요.”]'[“그래그래 조심해서 오고. 아줌마가 맛있는 떡국 만들어 놓을게. 꼭 여기서 한 살 더 먹는 거야.” ]'흔히 말하는 ‘새해’가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하 호호 떠드는 TV 속에선 온 가족들이 한복을 입고 나와 만두며 떡국이며 두런두런 둘러앉아 아침상을 맞이하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쌀쌀한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따사로운 햇살을 마주 보며 소민은 손에 들려진 캐리어를 정리했다. 사실 그녀는 오후쯤 짐을 싸서 나설까 생각했다. 하루 종일 텅 빈집에서 30분마다 한 번씩 오는 정숙의 전화를 무시한 채 그렇게 소민은 아침부터 한참을 소파에 앉아 멍하게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그곳에 계속 있는다 하여도 그 집에 초인종을 눌러 줄 사람은 없다.'TV에서처럼 웃으며 반겨 주는 가족도, 친척들도, 형제들도 나에겐 없었다.'어쩜 나도 저런 시간들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나지도 않았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그땐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고 그냥 잊어버렸다. 그런 것 같았다.' '“민이 왔구나! 어서 와. 여보! 민이 왔어요.”'“어서 들어와라. 꽤 춥지? 볼이 꽁꽁 얼었구나.”'“안녕하셨어요. 아줌마 아저씨.”'작고 따뜻한 그 집에 들어서자 정숙과 태식이 반겼다. 단아한 얼굴과 몸짓 하나하나 소민을 보듬어 주고 있는 정숙과 무뚝뚝하지만 먼저 말을 붙이며 미소 짓고 있던 태식이 조금은 떨리고 있던 소민이의 어깨를 따뜻하게도 감싸 주었다.'“짐은 이게 끝이니? 생각보다 많이 없구나. 아줌마 주렴. 올려다 줄게.”'“오늘 같은 날 이 녀석은 또 어디 나간 거야?”'“어디겠어요? 병원이겠지. 너무 그러지 말고 이것 좀 도와줘요 여보.”'어색한 듯 현관 앞을 떠나지 못하는 소민의 손에 들려진 캐리어를 집어든 정숙이 안쓰러운 마음으로 꾹꾹 눌려 담겨진 작은 짐을 쳐다보았다. 그 작은 공간 안 소민의 2년간의 시간과 벗어 두고 싶은 짐들과 잊어야 할 시간들이 담겨 있다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진 그녀가 얼른 고개를 돌려 태식에게 말을 붙였다. '소민은 가방을 정숙에게 건넨 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새로이 적응해야 할 그 공간을 살펴보았다. 그야말로 그들의 손길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만 같은 소담하고 따뜻한 공간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소민이 머물렀던 삭막하고 쓸쓸했던 빌라와는 다르게 큰 유리창에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햇빛이 쏟아지고 예쁜 소파 아기자기한 장신구들, 부엌에선 코끝을 자극하는 음식 냄새, 사람이 사는 냄새가 폐부 깊숙이 빨려 들어오자 못된 안도감에 그녀의 입술 새로 작은 한숨이 뚫고 흘러들었다.'“그래 여기 어때 민아? 민이 위해서 정말 많이 노력해서 찾은 집이야.”'“그런 소리는 뭐 하러 하고 그래.”'“왜요, 여보. 난 민이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죽겠어, 너무 예쁘지 그치?”'유난히 밝게 웃으며 정숙이 손을 내밀었다. 그 따뜻하고 다정한 손 위로 차갑고 보잘것없는 작은 손을 소민이 내밀어 보았다. 그리고 놓칠세라 꽉 잡아 주는 정숙의 온기를 느끼며 그녀는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소민이 아침에 본 TV 속처럼 정숙과 태식이 함께한 식탁 위는 맛있는 냄새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서린 떡국이 가득했다. 마치 그 모습이 엄마 아빠 딸처럼 단란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소민은 숟가락을 입에 넣으면서도 그들이 자신을 위해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많은 배려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찬우 녀석, 이런 날은 그래도 일찍 들어와야지 아니, 아예 나가질 말았어야지.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여보, 그렇지 민아?”'가만히 소민의 눈치를 살피던 태식이 짐짓 화를 내듯 말했지만, 그 내면엔 미안함이 깔린 사과를 소민에게 하고 있었다.'“아니에요 아저씨, 전 괜찮아요.”'그런 태식의 사려 깊은 마음을 알기에 소민은 슬며시 미소 지어 보였다.'2년 전 그녀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교통사고였다.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땐 이미 병원이었고, 혼자였고, 아무도 없었다.'하얀 병실에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하얀 머릿속을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생각하고 생각했었지만 사랑하는 엄마 아빠의 얼굴조차 기억해 내지 못했다. 사고 그 순간까지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병원에서는 사고 당시의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인 기억 상실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분명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나고, 충분히 휴식하면 생각날 거라 한 기억을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민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한 그 소소한 기억들을 행복이라 생각하지 못 하였던 것일까. 기억하려 하면 할수록 더욱 아득히 멀어져가는 형태에 소민은 고개를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