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들어온 지 어언 3년. 늘 그렇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녀는 벌써 3학년이 되어 있었다. 처음 동아리에 들어온 것도 다 옆에 있는 원수 같은 친구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녀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게 착실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동아리 생활을 잘 해가고 있었다. 물론 동아리 생활을 잘 해나가는 건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그녀가 받지 못하는 선배들의 사랑까지 한 몸에 듬뿍 받으며.'누구는 그렇게 날고 기어도 그냥 술 좋아하는 녀석이라는 평에 지나지 않는데 저 녀석은 가만히 있어도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점이 그녀는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이시여, 왜 이렇게 불공평하게 사람을 갈라 놓으셨나이까, 라고 절로 울부짖게 만들었다.'“하이고, 야, 나도 저 녀석 싫은 건 마찬가지거든? 그리고 왜 다 쟤한테만 물어. 나한테도 좀 물어봐. 좀. 좀!”'“시끄럽고. 신입생 MT도 즐겁게 즐겨보자. 한여름이.”'“왜요.”'“너 이 자식, 선배한테 토 다냐?”'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선배라고 해봤자 겨우 한 살 많은 주제에 늘 훈계인 한영은 여전히 오늘도 그녀를 구박하고 있었다. 거기다 한영의 학년은 2학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학번 낮은, 늦게 태어난 내 잘못이려니 생각하고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한영의 말발은 변호사를 능가하는 수준이었으니 대화가 길어져 봤자 손해 보는 건 늘 여름의 몫이었다. 그래,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여름은 그냥 씩 웃었다. 그때 선배가 그녀의 앞으로 빼곡하게 적힌 메모지를 내밀었다.'“중요한 술을 못 샀으니까 우리 도련님하고 마트 가서 이거 사가지고 내려와. 우린 먼저 출발할 테니까.”'도련님이란 그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요즘 시대에 도련님이 뭐야, 싶었지만 그저 얼굴을 보기만 해도 절로 쇤네라고 말하고 싶어진다는 한영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자타공인 잘난 남자 중의 남자였다.'“네? 제가 왜요? 싫…….”'“꺄악! 말도 안 돼요! 왜 여름이가 가요? 제가 갈게요!”'“싫어요! 제가 갈게요!”'여름이 싫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다른 여자애들이 발악을 하고 있었다. 녀석과 데이트를 하고 싶어 하는 애들이 이렇게 많은데 선배는 왜 자신에게 시키는 건지 그녀는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여름은 여자들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버스에 올라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발도 버스 위에 올려놓지 못했다. 한영이 순식간에 그녀의 뒷덜미를 잡으며 짐짝 나르듯 그에게로 던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여름의 오뚝한 코가 그의 가슴팍에 제대로 짓눌렸다.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한 것인지 그의 몸도 살짝 뒤로 밀렸다.'“악! 내 코!”'“야, 여기에 저 도련님을 남자로 느끼지 않는 사람 누가 있어? 저 망아지 한여름이뿐이지? 너희가 데이트를 하려는 목적을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리고 우리는 신입생들 챙겨야지! 우리 중에 임원 아닌 사람 누구야? 한여름이뿐이잖아!”'사실 신입생들 빼고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휴학 중이거나 임원이 대부분이었다. 여름이야 물론 그런 귀찮은 것이 싫어 학창 시절부터 임원 같은 건 절대 맡지 않은 것뿐이었다.'“너무해요, 선배!”'“독재자!”'“여름이 너, 같이 오는 동안 꼬리치기만 해!”'여자 동기, 선, 후배 할 것 없이 다들 여름에게 불꽃같은 질투의 눈길을 날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그녀 역시 그 당연한 보복이 두려워 그냥 모두와 함께 편안하게 가고 싶었지만 이미 버스는 멀어지고 있었다.'버스가 학교 정문을 완전히 빠져나가자 녀석은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의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갈팡질팡 서 있던 여름도 어쩔 수 없어 조수석 문을 열고 냉큼 올라탔다. 냉정한 녀석은 그녀가 타지 않으면 놔두고 그냥 갈 놈이었다.'그의 차 안은 늘 깔끔했다. 몇 번 타본 것은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깔끔했다. 자질구레한 물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전공서적 같은 것도.'그에 비해 다른 남자들의 차는 꼭 돼지우리를 연상시키곤 했었다. 자동차 하나 가지고도 그의 깔끔한 성격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원래 그녀가 기억하기론 분명 그의 차는 꽤 값을 한다던 외제차였다. 그런데 올해 국산의 중형급 차로 바뀐 것이었다. 아무리 중형급이라고 하더라도 그 외제차가 이 차보다 몇 배는 더 비쌀 텐데. 녀석의 집이 어려워지기라도 했나 싶었다. 하지만 그와 여름은 그런 소소한 가정사를 나누는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혼자만의 추측으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물론 집안이 조금 어려워졌다 해도 이 정도 차를 대학생이 끌고 다닐 정도면 웬만한 사람들보다는 잘산다는 것일 테니까 그렇게 불쌍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부모 잘 만난 걸 복이라 생각하며 살아야지. 돈 몇 백 원에도 덜덜 떠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 그런 사람을 오지랖 넓게 걱정해 줄 필요는 전혀 없었다.'그를 대하기는 유난히 불편했다. 분명 같은 나이일 텐데도 불구하고 한참 나이가 많은 사람을 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오늘도 역시나 말이 없었다. 이런 어색한 침묵이 싫어 그와 가는 것이 정말이지 싫었는데 다행히도 음악을 틀어주었다. 그래도 얼마만의 즐거운 MT인데 이렇게 첫날부터 기분을 망칠 수는 없어 여름은 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기도 했다.'가까운 마트에 도착해 메모지에 적힌 것들을 카트에 열심히 집어넣었다. 어찌나 많은지 카트 하나로는 해결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막 삼겹살을 받아 카트로 집어넣는데, 옆으로 지나다니는 여자들의 시선이 매섭다는 것을 그녀는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옆에 서 있는 잘난 녀석 때문이었다. 나도 좋아서 이 녀석과 다니는 게 아니랍니다, 라고 광고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어딜 가나 사람 이목을 잡아끄는 녀석 때문에 피곤한 건 역시나 여름이었다.'어서 빨리 갔으면 하는데 TV들이 진열되어 있는 곳에서 그는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여름은 그의 시선이 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면 안에 비춰지는 것은 검찰청 정문 앞이었다.'[……찰의 입장입니다. 김지원 전 대통령의 손녀인 김민선 씨가 행방불명된 지 100일이 지났지만 현재 아무런 진척도 없어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MBN 뉴스 장혜경입니다.]'그렇지 않아도 요즘 떠들썩한 사건이었다. 이런저런 추측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정치권에서도 그렇고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인 듯했다. 그녀 역시 학교 다닐 때부터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으니 역사에 관해선 굉장히 관심 있는 학생이었다. 자연히 대학교에 오자 운동권 학생들하고도 친해지게 되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몇 번인가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