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에서 돌아온 중원은 오늘도 장터에 나가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마침 다른 나라에서 배가 들어왔는지, 이국적인 복장의 사람들까지 뒤섞여 장터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고 있는 와중에 첫눈까지 내리는 중이었다. '중원은 장터 한 구석에 눈에 띄지 않게 걸터앉아서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모두가 바쁘고 분주한 이곳에서 유독 그에게만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인파들 사이로 누군가가 소리 없이 그의 뒤쪽으로 다가왔다. 중원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가 누구인지 아는지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왔는가.”'뒤에 선 키가 큰 사내는 중원의 호위무사인 강기였다.'“왕비마마께서 찾으십니다. 궁으로 돌아가셔야겠습니다.”'중원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강기를 쳐다보았다.'“어마마마께서 날?"'중원은 잠시 의문어린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무슨 일인지 깨달았는지 짜증스러운 얼굴로 바뀌었다. 그는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강기에게 말했다.'“앞장서게.”'강기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강기를 따라가는 중원의 발걸음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그는 자기생각에 빠져 앞도 살피지 않고 마음대로 내딛다가 맞은편에서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국의 복장을 한 여인과 부딪힐 뻔하였다. 몸이 빠른 그는 가볍게 그녀를 피했지만 여인은 그의 발에 걸려 결국 중심을 잃고 땅으로 크게 푹 처박히고 말았다. 상대가 크게 넘어진 모습을 보고도 그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던 길을 다시 가려했다.'“이보십시오!”'넘어진 여인이 말로 그를 붙잡았다. 키가 좀 크긴 했지만 호리호리한 체격의 여인이었는데도 그를 붙잡는 목소리는 여간 야무지고 씩씩한 게 아니었다. 때문에 그의 발길이 다시 멈추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물론 제가 주의하지 못하여 크게 넘어진 것도 있지만,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은 해야 예의가 아닙니까? 이 나라는 원래 이렇습니까?”'그의 눈길은 그녀를 향해 있었지만, 그는 입에서는 여전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가 이내 몸을 돌려 가버리고 말았다. '“에잇! 어찌 저런 사람이 있는가!”'그녀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크게 외치고는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꽤 엄청난 기세로 바닥에 처박혔는데도 옷과 무릎은 다행히 상하지 않았다. 다시 일어난 그녀는 번갈아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눈에 들어오는 장터 모습에 이곳이 어디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씨익 웃었다. 아마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녀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여기가 바로 그 신이국이란 말이지.”'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곳은 낯선 타국. 아무도 그녀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녀의 이름은 혜주, 열아홉 살의 나이로 혈혈단신, 이제 막 구부항에 도착한 터였다. '그녀는 이내 그와의 일은 잊어버리고 신나게 장터 이곳저곳을 누비며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이름도 모르고 용도도 짐작키 어려운 물건들이 잔뜩 있었고, 본 적 없는 먹을거리들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화려한 색채로 소문난 신이국의 의복들까지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 더.'“와! 이게 눈이로구나!”'그녀가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 크게 외치는 소리에 지나던 이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복장으로 보아 따뜻한 남쪽 나라, 궐국에서 왔을 것으로 짐작해서였다. 궐국은 일 년 내내 온난한 기후가 계속되어 눈이 내리지 않는 나라였다.'그녀가 어린아이 같이 토끼눈을 해가며 구경에 정신을 판 사이, 그녀의 뒤를 소리 없이 뒤쫓는 이들이 있었다. 언뜻 봐서는 수더분한 복장에 가려 평범한 사람들 같아 보였지만, 실은 몸이 날래고 힘이 좋은 사내들이었다. '“저 아이다.”'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신호를 보내자 모두들 그림자처럼 흩어졌다. 무리 중 사내 하나가 그녀 곁으로 다가가 친근한 표정을 가장하며 말을 걸었다.'“궐국에서 오셨나본데, 머물 곳은 정하셨소?”'혜주는 딱히 정해놓은 숙소가 없이 오늘 갑작스레 도착한 터라 사내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좋은 숙소를 아는가?”'“따라오시오. 내 아가씨에게 추천할만한 객주가 있다오.”'혜주는 그의 말을 의심 없이 믿고 그를 바로 따라 나섰다. 그저 타국에서 온 손님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녀는 사내를 따라 인적이 없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사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며 숨어 있던 다른 사내들을 불러내었다.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순식간에 그녀를 에워쌌고, 그 중 한 명이 마취약을 적신 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혜주는 저항할 틈도 없이 의식을 잃고 주저앉았다. 그들은 그녀를 둘러업고 누가 볼 새라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으으으음…….”'혜주가 신음을 흘리며 깨어났다. 낯선 장소, 아까 보았던 시장과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의 방이었다. 궐국에서 지내던 곳과 오히려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아픈 머리를 꾹꾹 누르면서도 계속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다시 궐국으로 돌아온 건가?”'혜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계속 방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분위기 자체는 비슷했지만 궐국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의 장식품들이 방 안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가구장에 쓰이는 문양도 궐국과는 달랐다. '“궐국은 아닌 듯도 하고…….”'혜주가 커다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문 앞으로 다가가는 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며 같은 복장을 한 대여섯 명의 여인들이 우르르 방으로 들어왔다. 그 중 한 여인이 혜주에게 가볍게 절을 올리며 말을 걸었다.'“새로 오신 그림자마마님을 뵈옵니다.”'그림자마마님이라니, 혜주는 난생 처음 듣는 말이었다. 궐국에서는 그림자 풍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어? 그 무슨…….”'“저희는 당분간 그림자마마님을 모실 궁녀들입니다.”'궁녀가 그간의 경험을 통해 미리 주의를 주는 의미로 ‘당분간’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힘을 주어 말했지만, 혜주는 그녀가 하는 말의 대부분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궁녀들은 그녀의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이내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시작했다.'“일단 목욕을 시켜드리고, 새로운 의복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그 말이 끝나자마자 김이 펄펄 나는 목간통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실 원당에는 따로 욕탕이 있었지만, 중원 외에는 그곳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편이 그녀들을 더 만족스럽게 했다. '중원은 그림의 떡인 지금이 가장 좋았다.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그 채로 변하지 않고 언제나 뒷모습만을 보여주는. 그래서 욕심낼 수 없지만, 누구도 가질 수 없어서 꽤나 공평한. 하지만 저네들끼리도 그런 속마음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지금 그녀들의 시중을 받는 이 귀태 나는 아름다운 아가씨도 곧 깨닫게 될 터였다. 그림은 아름답지만, 결코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궁에 머무는 시간만을 놓고 보면 차라리 그녀들이 더 좋은 자리일지 모른다. '혜주는 아직 마취약의 기운이 남아있어서 조금 멍한 상태인데다가 상황이 너무 빠르게 돌아가서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그녀들의 손에 이끌려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게 되었다. 그녀가 새로 입은 옷은 아까 시장에서 보았던 신이국의 여인들이 입는 복장이기는 했으나 시장의 그것보다 훨씬 좋은 원단으로 공들여 지은 옷이라는 걸 정신없는 가운데에서도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머리도 손질해 드리겠습니다.”'그녀들은 혜주를 의자에 앉혀놓고는 순식간에 엄청난 속도로 머리를 여러 갈래로 땋고는 다시 돌돌 말아 연하게 푸른빛을 띤 천으로 모아 묶었다. 그리고 왕비가 손수 마련해 준 옥을 물린 뒤꽂이를 꽂아 주었다. '“다 준비되었습니다.”'“아니? 잠시만 기다…….”'그렇지만 궁녀들은 순식간에 방에서 나가버렸다. 마치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간 느낌이었다. '“신이국 사람들은 손놀림이 엄청 빠르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그녀는 궁녀들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다가 시장에서 사내들을 만난 일이 떠올랐다. 혜주는 퍼뜩 정신이 돌아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납치당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 넋을 빼놓고 가만히 시중을 받던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다시 생각, 생각을 해야 할 때다. 정신 차려, 혜주!'“맙소사, 여긴 어디란 말이냐? 아까 그 사내들이 날 이상한 곳으로 팔아버렸다는 것인가?”'그녀는 불안한 시선으로 방 안을 계속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아까 일어났던 일들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곱씹어 보았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혜주는 하나씩 짚어 말해보기로 했다. '“아까 그 여인들은 자신들을 궁녀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를 그림자마마님이라고 불렀고…….”'그리고는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입혀진 붉은색 공단의복을 쳐다보았다. '“이 옷은 평범한 백성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닌 것 같고. 그럼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이곳은 궁이거나 왕족들이 머무는 곳일 것 같구나.”'혜주는 불안하게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값을 받고 팔려 버린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사주? 그것도 아니라면 아버지가 미리 나를 누군가에게 부탁하신 것인가?”'그것까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 방이 이미 누군가가 사용하고 있는 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탁자 위의 손때가 묻은 여러 권의 책들, 그리고 방 안 한 쪽 구석에 놓여있는 흑목화 때문이었다. '“하아……. 불길한 예감이 드는구나.”'혜주는 심호흡을 하곤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과연 예상대로 문 앞에는 두 명의 병사가 서 있었다. 그녀가 나가려고 하자 그들은 장창으로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나가실 수 없습니다.”'혜주는 아하하 멋쩍게 웃으며 다시 문을 닫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새로이 시작하고픈 마음으로 택한 신이국행이었건만 시작부터 뭔가 일이 꼬여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그 시각, 중원은 최대한 방으로 늦게 돌아가기 위해 일부러 왕비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첫눈이 내리는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그의 발길은 밤이 깊도록 방으로 돌아가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대군마마, 여기 계셨소이까.”'그가 등을 돌려 보니 그의 오래된 죽마고우이자 태학장을 맡고 있는 인량이 그에게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신난 표정을 보니 누군가로부터 그림자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단 하나뿐인 죽마고우라 단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말하는 것까지 봐주었는데 오늘따라 속이 쓰라렸다. '“놀리려고 온 것이면 그냥 돌아가.”'“놀리려고 왔는데 어찌 그냥 가나. 놀리고 가야지.”'중원의 미간이 순간 꿈틀하자, 인량은 움찔했다. 사실 무섭기도 하지만, 이 재미에 놀리는 것이었다. '“알았네. 안 놀림세. 그나저나 왕비마마께서도 참으로 지극히 우리 대군마마를 아끼신단 말이야. 이리도 살뜰히 챙겨주시지 않나. 사람 속도 모르시면서. 그렇지 않습니까? 대군마마.”'“가랬다.”'중원이 더욱 살벌한 목소리로 다시 말하자 인량은 수염을 가다듬으며 넉살좋게 대꾸했다.'“안 놀린다고 하질 않나. 사실은 대군마마가 기다리던 소식을 하나 알려주려고 온 거라네. 그러니까 오늘 새로 온 그림자마마님 너무 박대하지 말라고.”'“기다리던 소식?”'“소희낭자 소식 말이야.”'중원의 표정이 달라졌다. 소희에 관한 소식은 그녀가 떠난 뒤 몇 번 전해지지 않을 만큼 드물었다. 게다가 번번이 그가 기다리던 소식은 아니었다. 그런데 기다리던 소식이라면.'“말해 봐.”'“탐방단이 평국(平國)을 시작으로 해서 주안국(朱安國), 포국(浦國)을 거쳐 한 달 전쯤 소산국(逍山國)에 도착했다고 하네. 이제 돌아올 일만 남았어.”'“소산국…….”'“가장 북쪽이라 일 년 내내 겨울인 그곳 말일세.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감감무소식에 그간 우리 대군마마 속이 새까맣게 탔겠지만, 그래도 이제 일 년 정도만 기다리면 되질 않겠나. 나야 애초부터 그 추운 나라를 굳이 왜 찾아갈까 싶네만. 아, 소희낭자.”'백면서생인 인량조차도 그녀를 상상하면 흐뭇한 미소부터 번졌다. 누가 뭐래도 소희는 자타공인 신이국의 최고 미녀였다. '중원은 대답 없이 생각에 잠겼다. 삼 년 전, 그의 청혼에도 불구하고 소희는 탐방단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는 훌쩍 이 나라를 떠났다. 그를 달래고자 시작되었던 왕비의 귀찮은 그림자놀이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소희가 돌아와 그의 사람이 되면 그는 모든 것을 갖춘 단 하나의 왕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갖춘 왕자만이 위를 노릴 수 있었다. 소희는 왕로(王路)의 마지막 디딤돌이었다. 군왕의 징조니 뭐니 하는 얘기들은 결국 왕재(王才)들의 경쟁을 자극하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 밤새 눈이 올 것 같으니 대군마마도 돌아가시게. 고뿔이라도 들면 귀하신 몸, 큰일이 아닌가. 그럼 소신은 이만 가보겠네. 에헴.”'인량은 어느새 어깨에 쌓인 눈을 털면서 다시 왔던 길을 재촉해 돌아갔다. 중원은 다시 혼자 남겨졌지만, 아까와는 전혀 다른 흐뭇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 꼬리를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희가 돌아온단 말이지, 소희가…….”'그는 몇 번이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며 흐뭇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이제야 발길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돌아가 볼까.”''“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냔 말이지.”'혜주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고민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궁녀들이 자신을 채비시킨 것일 텐데 그녀들이 방에서 나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아무도 그 방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안했던 마음도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허기에 밀려나는 듯했다. 하기야 궐국의 생활에 단련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녀에게 있어 위기에 의연한 마음가짐을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낙천성이었다. '“참, 이왕 오기로 되어있는 사람이라면 빨리 오는 것이 좋으련만. 배도 고픈데……. 설마 이렇게 굶겨 죽이려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 이리 고운 옷을 입혀준 것을 보면.”'배 속에서는 아까부터 천둥 같은 소리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신이국에 도착한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허기가 심했다. 그녀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차라리 잠을 좀 자고 나면 배고픈 걸 잊을 수 있을 것 같은데…….”'잠시 잠을 청해볼까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무것도 파악되지 않는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잠이 들면 정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문 밖에서 누군가의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혜주는 벌떡 일어나 발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발소리는 그녀가 들어있는 방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다시금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혜주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안에 그림자마마님께서 들어계시옵니다.”'“알고 있다.”'낮은 남자의 목소리. 그녀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위압적인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상을 내오리까.”'“되었다.”'‘아니, 저 사람이! 내 의견도 좀 물어봐야 할 게 아니오!’'혜주는 그 순간 오늘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을 청해야 하는 방향으로 이미 상황이 결정 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큰 키에 늘씬한 체격의 남자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혜주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가 그녀에게 한 걸음씩 다가올수록 또렷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아, 아니 당신은 아까 그 무례한?”